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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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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5.16 군사혁명 (1961.5.16.) 5.16 군사혁명 (1961.5.16.) 이승만 대통령이 영도하는 자유당은 날이 갈수록 부패하기 시작했고 각 분야에서 국민의 불만은 커가기만 했다. 선거도 부정선거였고 이승만 대통령도 종신 대통령으로 자처하고 장기 집권을 꾀했다. 그러나 신익희 후보의 사망으로 더욱 심해진 민심 혼란은 급기야 4.19 학생 데모로 파급되고 이승만은 망명하는 운명이 되었다. 장면이 이어받은 정부도 별수 없었고 결국 박정희가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았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각 관공서는 군인들이 참여하게 되고 군인의 위세는 대단했었다. 나도 그때쯤 제대했으면 뭔가 한자리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소령이면 시장 또는 군수뿐만 아니라 그 밖의 요직에 참여할 수 있었던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세월은 흘러 62년이 되..
44. 숙명의 입원 생활 (1959년 여름) 숙명의 입원 생활 (1959년 여름) 결국 23 육군 병원을 거쳐 밀양 제15 육군 병원으로 정식 입원했다. 폐결핵 환자만을 수용하는 전문병원이다. 이곳 말고 마산에 정양원도 있었으나 나는 밀양에서 적어도 2년 이상 병상 생활을 해야 전치가 가능하다고 군의관은 말했다. 병실은 영관급 장교만 수용하는 별도 병실인지라 병원 내에서의 대우는 좋왔다. 같은 환자끼리 있으니 위로도 되고 서로 격려하며 긴 병상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점차 적응되었다. 다만 병원에서 공급되는 주부식만으로는 영양이 부족하기 쉽고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찾기 어려워 대전에 있던 가족을 밀양으로 이사시켰다. 집은 세를 놓고, 단칸방을 얻어 가족은 그곳에서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모든 것이 큰 고생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병원에서 병상 생활을, ..
43. 32사단 공병대대장으로 발령 32사단 공병대대장으로 발령 지긋지긋한 사령부 근무를 마치고 또다시 조치원에 있는 32 예비사단으로 전속명을 받았다. 이제야 다시 대대 근무를 하게 되었고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아 다행스럽게 생각했으나 막상 대대장 생활을 해보니 기대와는 딴판으로 부하도 없이 기간 요원만 몇십 명뿐이었다. 당시 예비사단의 초창기였기 때문에 예비병 교육과 편성 작업도 되지 않아 순전히 기간 요원만으로 사단 운영을 해왔다. 그래도 비교적 시간이 많아 사단 전반의 공병 기능만 유지한다면 그리 힘든 생활은 아니었으나 나의 일련의 과거 군대 생활에 비하면 완전히 뒤로 밀린 처지에 틀림없었다. 그러니 마지못해 근무하는 연약한 입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58년 여름에 나의 건강을 생각할 때 이제부터 몸에 관심을 두게 되어 청..
42. 육군대학교 교육 1955년, 여름 휴전 이후 2년이 지난 이 무렵 나에게 치명적인 불행이 닥쳐올 줄이야! 후방에 전후방 교류로 내려와 이제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왔다고 내심 좋와했는데……. 전방에 있을 때 이미 건강에 이상이 온 것을 약간 느끼고 있었으나 설마 큰 문제가 있으랴 했다. 그런데 피로를 느끼고 졸음이 오고 소화가 안 되고 춥고 열이 나고……. 의료 시설도 별로 없고 자각 증상만으로 건강을 체크 할 정도의 분위기였었기에 후방에 올 때 신체검사를 받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정부의 방침과 군대의 전후 의료 시설의 확충으로 장교들에 대한 종합 검사가 실시되었다. 당시 서대전에 있던 63 육군 병원에서 X-Ray를 찍어보니 肺가 손상되고 오른쪽 어깨 밑 상엽과 좌측 중엽 두 곳에 뚜렷한 상처가 발견되었다. ..
41. 대전 생활, 은숙이 낳고 대전 생활, 은숙이 낳고 대전에서의 생활은 바빴다. 복구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고 건설 공병인 우리 부대는 대전 시내에 있는 대규모 부대의 시설물 건설이 주 임무였다. 공사마다 모두 시일이 급박하여 낮에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퇴근 시간이란 없는 군대 생활이다. 물론 장교였기 때문에 영외 거주를 할 수 있는 처지인지라 밤에는 집에서 쉬는 자유시간은 많았다. 그러나 아직 집은 없는 실정이라 이곳에 와서도 전세 신세는 면치 못하였다. 삼성동에 살던 집에서 선화동으로 이사를 하고 당분간 그곳에서 살으니 이곳에서 둘째를 낳았다. 건강한 여자아이였다. 이름을 은숙이라 지었다. 1957년 2월 14일생이다. 이제 아이가 둘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생활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었으나 워낙 밑천이 없고 붕급만 갖이고 ..
40. 수색에서 첫 아이 낳고 수색에서 첫 아이 낳고 매일매일 계속되는 작업은 한결같이 같았다. 나는 때로 순찰 차 부대에 들른 공병단장과 진부령을 넘어 간성에 가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곤드래 만드래 될 때까지 놀기도 했다. 단장은 호기있고 군인다운 타입이었으므로 어느 집에서나 대환영이었고 나 역시 술에는 자신이 있고 해서 의기가 투합되니 이런 자리가 여러 번 있었다. 간성부터 속초까지 갈 때도 있었다. 젊은 날에 참으로 좋은 시기였는데. 호사다마라 할까. 이때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있었으나 큰 관심을 안 갖고 수개월을 그냥 보냈는데 그 증상이 앉기만 하면 졸음이 오고 식은땀이 나고 소화도 잘 안 되었다. 이런 증상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건강을 믿었다. 그러던 중 나는 서울 북방에 있는 수색으로 파견 나가기로 명령을 ..
39. 전후방 교류로 후방에 그리고 또 전방에 전후방 교류로 후방에 그리고 또 전방에 휴전이 되니 장교들의 전후방 교류 인사가 실시됐다. 士氣振作의 일환으로 장기간 전방에 근무한 장교의 인사로 나는 그것에 해당되어 후방으로 오게 되었다. 대전에 있는 공병대의 본부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오랫동안 전방에서만 근무한 나로서는 모든 생활이 익숙하지 못했으나 후방에 왔으니 뭔가 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나의 신변정리를 시작했다. 즉시 고향에서 아내를 데리고 와 부대 근처에 새살림을 시작했다. 아내는 그렇게 좋와할 수 없었다. 결혼 즉시 고향에서 부모님과 시동생의 뒷바라지며 식량난으로 죽으로 연명하다시피 하다가 이곳에 와 남편과 같이 있게 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방 한 칸짜리 농가였고 살림살이도 급조식으로 장만했다. 그럭저럭 신혼생활을 하는 데는 ..
38. 결혼 결혼 교육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용인의 양한례 집에 들렀다. 용기를 내어 가족과 만났다. 그 가족은 모두 군인과 교제한 것을 싫어했다. 그동안 군사 우편으로 서로 안부를 묻고 부대 마크까지 정성들여 수를 놓아 부쳐온 과정이 나로서는 기쁨과 희망을 준 교제였었다고 정식으로 혼인의 의사를 표하여 가족들의 승낙을 받았다. 부대로 돌아와 보니 부대는 주파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직 주파리에서 진지 보수니 도로작업이니 할 일이 꽤 많아 한참 동안 결혼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느 날 대대장에게 결혼에 대해 상의를 했더니 처음에는 시기가 시기인지라 하면서 생각을 해보자고 말을 끊었다. 괜히 말하였구나 후회했으나 기왕에 말을 한 것이니 기대 반으로 나의 할 일에 몰두했다. 그동안에 나는 고향의 부모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