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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44. 숙명의 입원 생활 (1959년 여름)

숙명의 입원 생활 (1959년 여름)

 

결국 23 육군 병원을 거쳐 밀양 제15 육군 병원으로 정식 입원했다. 폐결핵 환자만을 수용하는 전문병원이다. 이곳 말고 마산에 정양원도 있었으나 나는 밀양에서 적어도 2년 이상 병상 생활을 해야 전치가 가능하다고 군의관은 말했다.

 

병실은 영관급 장교만 수용하는 별도 병실인지라 병원 내에서의 대우는 좋왔다. 같은 환자끼리 있으니 위로도 되고 서로 격려하며 긴 병상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점차 적응되었다. 다만 병원에서 공급되는 주부식만으로는 영양이 부족하기 쉽고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찾기 어려워 대전에 있던 가족을 밀양으로 이사시켰다. 집은 세를 놓고, 단칸방을 얻어 가족은 그곳에서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모든 것이 큰 고생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병원에서 병상 생활을, 가족은 따로 살림을. 자식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학업에는 걱정이 없었다. 생활은 기본 월급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이 무렵부터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세도 받았다. 그리고 견진까지도. 나는 과거의 생활을 통해 그 속에서의 가치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가치는 종교적 의미와 현실적인 경제문제 그리고 인간의 속성의 한계로 집약하게 되어 나름대로 많은 시간을 이에 할애한 것 같다.

 

병원 생활을 하니 시간은 많고 외부와의 접촉도 별로 없고 나라는 인간이 그 쓸모에 있어 이미 사양의 길로 접어든 것 같은 심리적 작용이 커지고 있던 것이다. 나는 종교는 별로 좋와하지 않했다. 사람이 사는데 규제도 싫었고 또 천당이니 지옥이니 그리고 영혼은 영원하고 육신은 죽으면 그만이다 등등의 교리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러나 교리에 대해 그 면면히 이어져 있는 하나의 줄거리와 정신은 참으로 오묘하고 위대하기만 했다. 사람의 인지를 초월한 듯한 그 내용은 여러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고 미약한 인간으로서 그저 고개를 수그리게 한다. 인간은 수명에 한계가 있기에 그 수명에는 엄숙히 수긍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의 속성을 초월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사는 동안이라도 한 가지 숙명적 소신은 있어야 한다. 사람은 뭣 때문에 살아야 하나. 그렇지 못하면 인간의 속성은 제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인간 생활의 안녕은 하나의 기본이기에 그 기본을 천주교 정신에 맡겨 질서 집단의 일원으로 동참하고 그 정신 계승에 힘쓴다면 적어도 인간다운 인간으로서의 진면목을 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천주교만이 그 유일한 길은 아닐지라도 교리와 정신은 내가 생각하는 여러 종교 중에서 가장 나의 성미에 맞고 또 입원 중인 나로서 정서적 함양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점차 천주교의 여러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병원 생활 2년이 지나면서 나의 건강도 많이 회복되고 이미 건강에는 낙인찍힌 처지였으나 아직 젊고 앞으로의 할 일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실지로 종교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갖이게 되어 점차 종교 활동은 미미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정치적으로도 나라가 혼미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의 전횡은 점점 더했다. 대통령 선거에 부정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사회의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급기야 3.15 부정선거로 또다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우리 병원의 영관 병실의 12인의 환자도 모두 신익희 후보에 몰표를 했으나 (물론 신익희는 선거 유세 중 병으로 쓰러져 사실상 투표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과는 우리 투표소(병원내)에 신익희 표는 하나도 안 나왔으니 이게 웬 말인가. 사회의 혼탁이 이 정도였다.

결국, 이로 인해 이승만이는 국민의 항의(대대적 데모)로 인해 실각하고 말았다. 그 후 하와이로 망명하는 꼴이 되고 그 후 장면이 정권을 잡았으나 이것 역시 무능 정부로 매일같이 국회의사당을 상이군인들이 또 의회에서의 난동 등으로 우리나라의 정국은 참으로 암담하기만 했다.

 

이래저래 병원 생활도 1년 반쯤 되고 보니 나의 병도 많이 호전된 것 같았으나 X-Ray에는 여전히 병반이 남아 있고 전문가 아니면 잘 모를 정도였다. 밀양에서의 가정생활은 그럭저럭 이어나갔다. 규숙이는 성당의 유치원에 보내고 어린 은숙이는 철모르게 커갔다.

 

입원 생활을 했어도 신분은 군인이니 월급은 여전히 나와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월급 받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기를 바랐으나 병이 병이니만큼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입원은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나 군 당국에서는 하나의 골칫덩어리가 되고 있었다. 환자는 나날이 늘고 수용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환자들은 장기 입원한 경력으로 퇴원해봤자 승진은 고사하고 혹 자기 병의 재발을 염려해서 입원을 원했다.

이렇게 장기 입원했으니 나의 성격상 마음도 타락된 것 같은 낙오 의식이 형성되어 매사가 침체 된 기분이었다. 이미 사회적으로는 죽은 사람과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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