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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의 창작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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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희 봉달희 강현자 내 이름은 봉달희. 그녀가 붙여 준 이름이다. 물론 다른 이름도 몇 개 있지만 그녀는 나를 그렇게 부른다. 그녀가 좋아하는 나는 노란 원피스에 초록 모자를 쓰고 있다. 그 안에 감추어진 나의 속살은 갈빛 작은 알갱이와 포슬포슬한 우윳빛 가루, 까슬까슬하면서 달콤한 하얀 가루가 황금비율로 배합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운명의 신이 내편에 있었는지 그녀의 눈에 들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성미가 급하고 늘 동동거리며 바쁜 일상을 보내는 그녀에게 나는 단박에 비위를 맞춰줄 수 있고,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한 양으로 그녀가 부르면 언제나 느긋한 향기와 달달함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그녀가 멋진 사진을 찍으러 먼 ..
관계 관계 강현자 여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파란 공간에서 그녀의 빨간 입술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문밖에서 고양이가 들여다본다. 지금 숨을 죽이고 있다. 문우의 그림 전시회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끈 작품이다. 사색에 잠긴 그림 속 여인은 그분 자신을 그린 것은 아닐까. 수필공부만 하는 문우인 줄 알았는데 그림까지 수준급이다. 팸플릿을 받아들자마자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자주 얘기를 나눠보지 못해서 마음이라도 표하고 싶었다. 그림 속 여인에게 마음을 전하듯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다. 전시회를 자주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전시회에 갈 때마다 주눅이 든다. 그림을 제대로 볼 줄도 모르고 화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란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그림에 대해서는..
괜찮아 괜찮아 강현자 내 모습이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야. 지금은 반 쪼가리가 되어 가끔 책장 먼지나 닦는 신세가 됐지만 말이야. 문제는 물휴지란 녀석한테 내 역할을 뺏길 때도 더러 있다는 거지. 게다가 주인 여자는 요즘 키가 훤칠한 녀석에게 빠져 있다구. 녀석은 전기만 꽂으면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힘도 안 들이고 바닥을 닦아주거든. 그러니 강아지가 먹다 남긴 마른 뼈다귀처럼 베란다 구석에서 며칠째 주인 눈길만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지. 나도 처음부터 걸레는 아니었어. 주인아저씨가 동창 체육대회에서 나를 데리고 왔을 땐 제법 균형 잡힌 미끈한 몸매였지. 살짝만 손을 대도 폭신폭신한 촉감이 사랑스러운 보드라운 피부였어. 아침마다 가족들 얼굴에 말간 희망을 심어 주었고, 저녁이면 온몸에 박힌 스트레스를 지워주..
바위틈에 피는 꽃 바위틈에 피는 꽃 강현자 어디서 날아들었을까. 윤기 마른 화초 가운데 유독 맑은 연둣빛 작은 풀싹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이 채 가기 전 옅은 햇살이 창가를 서성일 때쯤이었다. 겨우 잎 모양을 갖춘 것이 이제 막 앞니가 나오는 아기처럼 앙증맞았다. 불청객치고는 귀엽고 여릿해 차마 뽑아낼 잡초감도 못 되었다. 키가 훤칠한 워킹아이리스 화분 그늘 안에서 언제까지 자랄 수 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뽑혀나갈 때 뽑히더라도 들판에서 버젓이 햇볕이나 달게 받고 튼실하게 행세할 일이지 어쩌자고 이곳까지 와 자리를 잡았을까. 가녀린 줄기에 맺힌 억척스런 생명력이 안쓰럽더니 어느새 뾰족한 꽃봉오리를 맺었다. 화분에 곁자리를 얻었으니 남의 집에 얹혀사는 기죽은 아이처럼 들판 제집에서만큼 튼실하..
충청도 사투리 수필 대문 즘 열어 봐유 강현자 발쌔 가을인게비네유. 시월이 왜 그르키 빨르대유. 고놈의 코로난지 머시깽인지 땜이 정신이 항개두 읎슈. 예전 겉으먼 아이덜 운동히다 뭐다 혀서 동네가 떠들썩했겄구먼 천지사방이 조용허네유. 가을걷이 끝내먼 우리 마을 부녀히서 단풍 구이경두 갔을 틴디 뭐 워쩌겄어유. 집구석이나 틀어백혀 호냐 있이야쥬 머. 아이구, 그라고 보니께 옛날 생각나네유. 우리 동네 종냄이네 뒷집에 대처 사램이 이사를 와가꾸 살었었슈. 그 빨간 벡돌 이층집언 워냥 쥔은 따로 있넌디, 뭔 일인가 젊은 새닥네가 시를 읃어 왔대내뷰. 워째 이런 촌구석이까지 들으왔으까 동네 사램덜언 궁금했지만서두 그맇다구 대놓구 물어볼 수는 읎잖유. 그냥 뭐 속딘 말루다가 워티기 절단나서 왔내비다 하믄서 쉬쉬 했쥬 뭐. 새루 이사..
불편한 동거 불편한 동거 강현자 ‘달그락….’ 무슨 소리지? 며칠 전부터 그는 고요한 틈을 타 슬며시 내게 노크했다. 평소에도 아둔한 편인 나는 그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처음에는 윗집에서 나는 소리인가 보다 했다. 그러다 어떤 때는 작은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별 것 아니려니 생각했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어디서 ‘투두둑’ 소리가 난다. 깜짝 놀라 뒤를 보니 던져진 그물을 삼킨 강물처럼 정적만 흐른다. 순간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디서 나는 것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귀며 눈이며 나의 온 말초신경이 곤두선다. 싱크대 어디쯤인 것 같기도 하고 세탁기 내부인 것 같기도 하고 식기세척기 안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
막 강현자 마스크를 벗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비틀어진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3월 하늘이 깊다. 굽은 도로를 막 돌아서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나무가 휙 하고 지나간다. 백 미터쯤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휴대폰에 담았다. 이제 막 물오르기 시작한 오래된 버드나무였다. 매운바람이 쉼 없이 달려와 따스한 봄볕을 쬐는 버드나무 가지를 후려치고 있었다. 여린 연둣빛 가지가 사선을 그어댄다. 파란 도화지에 얼레빗처럼 그려낸 가지런한 무늬가 꽃샘바람에 몸살을 앓는다. 봄이 그리 쉽게 오지 않듯 그도 쉬이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우리는 놀람과 호기심으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웬 호들갑이냐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금세 곁으로 바싹 다가온 그..
함박꽃 함박꽃 함박꽃은 ‘순자’다. 서양에 장미가 있다면 동양에는 함박꽃이 있다고 할 만큼 화려한 꽃이라지만 볼 때마다 그 흔한 ‘순자’라는 이름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순하고 마음 넉넉한 이웃집 순자, 어디서나 만나면 방싯방싯 웃으며 다가올 것 같은 여자, 그러면서 늘 자신을 낮추는 속 깊은 여자 말이다. 호수공원에 함박꽃이 지천이다. 수채화인 듯 겹쳐진 꽃잎의 농담이 선연하다. 속살거리는 햇살에도 채 못다 핀 꽃잎 하나. 부끄러워 얼굴을 반쯤 가린 영락없는 순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꽃말이 수줍음인가 보다. 큼지막한 함박에 노른자를 체에 거른 듯 샛노란 꽃술이 포슬포슬하다. 차반에 집적대는 꿀벌들의 흥타령이 왁자하다. 수틀이 자리를 거지반 차지한 어머니의 방엔 화려한 색깔을 고루 갖춘 8자 모양의 작은 비단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