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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의 창작 수필

봉달희

봉달희

 

강현자

 

   내 이름은 봉달희. 그녀가 붙여 준 이름이다. 물론 다른 이름도 몇 개 있지만 그녀는 나를 그렇게 부른다. 그녀가 좋아하는 나는 노란 원피스에 초록 모자를 쓰고 있다. 그 안에 감추어진 나의 속살은 갈빛 작은 알갱이와 포슬포슬한 우윳빛 가루, 까슬까슬하면서 달콤한 하얀 가루가 황금비율로 배합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운명의 신이 내편에 있었는지 그녀의 눈에 들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성미가 급하고 늘 동동거리며 바쁜 일상을 보내는 그녀에게 나는 단박에 비위를 맞춰줄 수 있고,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한 양으로 그녀가 부르면 언제나 느긋한 향기와 달달함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그녀가 멋진 사진을 찍으러 먼 길을 나설 때면 꼭 나를 먼저 챙긴다. 멋진 장면을 찍기 위해 유리조각이 얼굴에 박히는 듯한 날선 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고의 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차 안에서 얌전히 그녀를 기다린다. 작업이 끝나면 추위에 곱은 손과 빠알갛게 얼어버린 얼굴로 그녀는 내게 돌아와 마치 첫사랑의 밀회라도 즐기듯 조심스레 나의 옷을 벗긴다. 난 너무 떨려서 내 하얀 속살을 민망하게 불쑥 내보일 때도 있다. 그녀가 두 손으로 나를 꼭 안아주면 나는 그만 황홀감에 취해 그녀의 입술을 더듬으며 사랑에 빠지고 만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조차 그녀는 그 흔한 해외파 친구들을 마다하고 나만을 고집한다. 그럴 때마다 난 행복에 겨워 작은 나의 공간에서 그녀의 손에 이끌려 원을 그리며 온몸으로 춤을 추곤 한다.

   언젠가 위가 안 좋다는 이유로 나를 멀리하라는 의사의 충고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에도 그녀는 반만 줄이면 안 되겠냐며 의사에게 엉뚱한 사정을 한 적도 있었다. 순간 나는 팡파르라도 울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참 일에 열중하는 오후 시간이면 내가 지친 그녀를 살포시 달래주기 때문이다. 이토록 그녀는 나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아들이 누가 요즘에 몸에도 안 좋은 걸 이렇게 잔뜩 사다놓고 마시냐며 핀잔을 주더니 원두라는 녀석을 데려다 놓고 갔다. 식탁 위에 떠억 하니 한 자리를 차지한 그 녀석은 거만한 풍채와 세련된 향기로 나를 압도했다. 그 후로 친구들이 놀러오면 원두를 자랑하는 건지 아들을 자랑하는 건지 온통 진한 향기를 거실 가득 뿌리면서 내게는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친구들은 각자 본인의 취향에 따라 아메리카노, 라떼, 에스프레소를 운운한다. 그럴 때면 나는 유행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게다가 어디서 무슨 소릴 듣고 왔는지 거울에 연신 자신의 옆모습을 비추면서 유난히 볼록한 아랫배를 손으로 가려도 보고 힘도 주어 보며 부쩍 신경을 썼다. 그 배가 다 나 때문이라나? 그러더니 이젠 아예 싱크대 구석에 처박아 놓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난 빛도 못 본 채 웅크리고 앉아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자만심은 질곡의 골짜기에서 나의 태양을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한 가닥 빛도 들지 않는 좁은 공간에 있으려니 깜깜한 독 안에 갇힌 생쥐마냥 두렵고 막막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불안함이 목을 죄어 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순간 배 안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몇 날 며칠을 꼼짝 않고 있자니 온몸이 굳어가는 것만 같았다. 누가 말했나. 사랑은 가장 변하기 쉬운 인간의 감정이라고…….

   어두운 구석에 갇혀버린 나는 억울했다. 그녀에게 외면당한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 나의 잘못을 알려달라고 애원도 해 보았지만 못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윗을 따르고 박수치던 백성들이 시글락의 절망적인 상황을 보고 그들의 분노와 원망을 한순간 뒤집어 다윗에게 돌을 들었을 때 다윗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도밖에 없었다. 나도 시글락의 다윗이 되었으니 해와 달이 된 오누이처럼 동아줄이라도 내려 달라고 기도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지쳐 그녀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사랑만을 믿고 오만하게 굴던 것을 반성하라고 주어진 시간인 것 같았다. 그동안 받았던 사랑에 감사하며 날 내다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되지 싶었다. 퀴퀴하고 차가운 어둠 속에서 난 옛일을 그리워하며 그녀의 손길이 다시 내게로 닿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처음엔 억울함과 원망으로 분노했다가 차츰 절망과 포기를 거쳐 이젠 반성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변해가고 있었다.

   나의 기도가 받아들여졌을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아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가기로 약속을 하는 것 같다. 벌써부터 들떠있는 그녀는 여행에 가지고 갈 옷가지며 소지품 목록을 적느라 분주하다. 옷은 무얼 가져갈까? 신발은 편한 운동화면 되겠지? 약도 챙겨야 하는데……. 마치 처음 소풍가는 어린 아이의 모양새다.

 

   아참!, 봉달희도 챙겨야지!”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거기가면 생각 날거야. 뭐니 뭐니 해도 봉달희가 최고지!”

 

   나는 하마터면 싱크대 문을 박차고 튀어나올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싱크대 문이 활짝 열리고 갑자기 들이닥친 빛줄기에 나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나의 허리를 움켜잡은 그녀의 손길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낯선 이국땅에서 그녀와의 입맞춤을 상상하며 봉달희의 마음은 벌써 비행기에 올라 하늘을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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