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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의 창작 수필

불편한 동거

불편한 동거

 

강현자

 

  ‘달그락.’

  무슨 소리지? 며칠 전부터 그는 고요한 틈을 타 슬며시 내게 노크했다. 평소에도 아둔한 편인 나는 그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처음에는 윗집에서 나는 소리인가 보다 했다. 그러다 어떤 때는 작은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별 것 아니려니 생각했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어디서 투두둑소리가 난다. 깜짝 놀라 뒤를 보니 던져진 그물을 삼킨 강물처럼 정적만 흐른다. 순간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디서 나는 것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귀며 눈이며 나의 온 말초신경이 곤두선다. 싱크대 어디쯤인 것 같기도 하고 세탁기 내부인 것 같기도 하고 식기세척기 안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적에 나의 신경은 이미 벼린 칼날이다. 조심스레 싱크대를 열어 샅샅이 뒤져봐도 의심이 갈 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조용한 밤이라 소리가 더 크게 들렸을까. ‘우당탕탕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리려는 듯 신호를 보내왔다. 누군가 안에 있음이 확실해졌다. 덩치로 치면 고양이나 토끼쯤은 될 듯싶었다. 순간 얼음이 된 나는 온몸이 쪼그라들었다. 심장 소리가 그의 움직임에 비례해 정적을 가르고 있었다. 싱크대 문짝을 박차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내게로 달려들 것만 같다. 긴 꼬리를 끌며 이곳저곳 기어다니는 모습이 떠올랐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하니 그럴 리가 없다며 대충 훑어보고는 그냥 돌아갔다. 하기야 아무런 증거는 없었으니까.

  안에 있는 그는 자신의 정체를 몰라주는 내게 존재감을 알리려 더 큰 동작으로 달음박질치더니 찍찍거리기까지 한다. 분명 나를 부르는 소리다. 사실이 아니길 바랐는데 설마가 아니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방아 찧듯 한다. 귀가 먹먹하고 몸에 힘이 쭉 빠진다. 그와의 거리는 불과 몇 센티미터. 바로 발밑에 얇은 판자를 사이에 두고 영역을 확보하려는 그와 이를 방어하려는 나의 대치 관계가 팽팽하다. 공포와 긴장감에 숨이 막힌다. 온몸이 스멀스멀 근지럽다.

  경자년 올해 연초부터 그의 갖가지 캐릭터가 등장했고 그의 부지런함을 칭송했다. 올해의 운수를 점치기도 하고 우리도 그렇게 잘살아 보자며 행운을 빌었다. 우리의 바람이 무색하게 모두 코로나바이러스에 시달리고 있는데 정작 그는 저렇게 활보하고 있지 않은가. 태초에 하느님이 동물들을 축제에 초대했을 때 얍삽하게 소의 덕을 톡톡히 본 녀석이다. 소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려 제일 먼저 도착해 십이지간의 첫 번째 주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 중에도 이렇게 잔꾀를 부리며 남의 덕을 슬쩍 보려는 이가 있어 미간을 찌푸리기도 한다.

  그의 존재가 확실해지자 단숨에 약국으로 향했다. , 왜 하필 약봉지 겉면에도 그의 초상화를 그려 놓았단 말인가. 그냥 글씨로만 써도 다 알아볼 것을. 오늘만큼은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라도 달갑지 않다. 나는 그의 모습을 피해 손가락으로 봉지 끝을 간신히 잡고 가위로 개봉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제발 이 순간만큼은 저만치 가서 내 눈에 보이지 않기를. 끈끈이와 포일 위에 약을 올려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쥐가 사람으로 둔갑하여 사람 행세를 했다는 옛날이야기가 생각났다. 집주인이 함부로 버린 손톱과 발톱을 먹고 자란 쥐가 사람으로 둔갑하여 주인행세를 하고, 진짜 주인은 쫓겨나 갖은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다. 인도 설화에도 남편이 멀리 나가 있는 사이에 쥐가 사람으로 둔갑하여 남편 행세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웃다 못해 씁쓸함을 더한다. 이러한 설화는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경각심을 깨우치기 위함이리라. 하지만 나는 손톱 발톱 하나도 허투루 버린 적이 없고 음식 찌꺼기도 꼭꼭 밀봉해서 완벽하게 처리하려 애써왔다. 하기야 빈틈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기는 법이니 핑계를 댈 수도 없다. 변신한 그가 싱크대 안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지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녀석한테 조롱당하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약을 놓고 끈끈이를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포일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나 다를까. 터덕터덕 한바탕 소란을 피우더니 찍찍 괴로워하는 소리에 또 한 번 소름이 돋는다. 이제 됐다. 단단히 걸린 거야. 저도 별수 없지.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가 보다. 오늘 밤은 편히 잘 수 있겠지.

  어제 일로 아침도 거르고 결과가 궁금했다. 확인해야 하는데 어떡할까 고민하는 순간 싱크대 아래 이쪽에서 저쪽까지 우당탕탕 긴박하게 달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묵직하다. 아직 살아있었다니. 더는 망설일 수가 없다. 간밤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생각해 놓은 방역업체를 부르기로 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서 전화번호도 제대로 누를 수가 없다. 목소리는 이미 물에 젖은 바지 마냥 후줄근해졌다. 녀석이 있는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른다.

  곧 방역업체에서 달려와 싱크대 밑을 열었다. 하수구로 연결되는 관이 뚫린 것이 원인이라고 했다. 어제 놓은 끈끈이에 덩치 큰 녀석이 들러붙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 아직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그의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태풍 마이삭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녀석과의 불편한 동거는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듯 나의 일상을 온통 마비시키고 말았다. 녀석도 나도 모두 절실했다. 그는 목숨 보전이 절실하여 먹이를 구하러 며칠을 서성였을 것이고 나는 그런 녀석을 없애야 하는 절실함이 간절했다. 간절함이 큰 만큼 받아들여야 하는 바람의 세기도 거셌다. 그와의 불편한 동거는 나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태풍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새소리마저 녀석의 목소리로 들린다. 도저히 밥을 해 먹을 수가 없어 식당을 찾았다. 낙지 다리가 녀석의 꼬리로 보인다. 까만 미역국을 보고도 그가 떠올랐다. , 왜 하필 낙지볶음을 주문했을까. 후회막급이다. 분명 내가 이긴 게임이건만 통쾌함이 없다. 아직도 나는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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