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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의 창작 수필

괜찮아

괜찮아

 

강현자

 

내 모습이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야. 지금은 반 쪼가리가 되어 가끔 책장 먼지나 닦는 신세가 됐지만 말이야. 문제는 물휴지란 녀석한테 내 역할을 뺏길 때도 더러 있다는 거지. 게다가 주인 여자는 요즘 키가 훤칠한 녀석에게 빠져 있다구. 녀석은 전기만 꽂으면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힘도 안 들이고 바닥을 닦아주거든. 그러니 강아지가 먹다 남긴 마른 뼈다귀처럼 베란다 구석에서 며칠째 주인 눈길만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지.

 

나도 처음부터 걸레는 아니었어. 주인아저씨가 동창 체육대회에서 나를 데리고 왔을 땐 제법 균형 잡힌 미끈한 몸매였지. 살짝만 손을 대도 폭신폭신한 촉감이 사랑스러운 보드라운 피부였어. 아침마다 가족들 얼굴에 말간 희망을 심어 주었고, 저녁이면 온몸에 박힌 스트레스를 지워주었지.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다른 친구들처럼 붙박이장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도 없었어 나는. 개구쟁이 아들은 내가 없으면 잠을 못 잘 정도였지. 아들과 난 언제나 한몸이었다구. 나를 몸에 칭칭 감거나 내게 얼굴을 묻어야 잠이 들었거든.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했던가? 내 몸에 묻은 얼룩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더니 결국은 발만 닦는 보직을 맡게 됐어. 말하자면 발씻개가 된 거지. 처음엔 좀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고 보면 나도 몸이 예전 같지 않았었나봐. 자리에서 밀려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나야 지금껏 최선을 다했고 사랑도 듬뿍 받았으니 이 정도쯤이야 뭐 어떻겠어?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욕실 앞에서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면 되니까 사실 내 능력이 좀 아깝다는 생각은 했지.

 

그런데 말이야, 어느 날은 주인 여자에게 택배가 배달됐지 뭐야. 욕실에서 나오면 바로 뽀송뽀송하게 발을 말려주는 신개념 매트가 온 거야. 당연히 내 자리에 위협을 느꼈지. 정말 울고 싶었어. 하필 그날 꼬마 녀석이 물을 엎질렀는데 여자는 재빨리 나를 끌어다 닦더니만 그때부터 역할이 바뀌게 되었어. 말하자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 거지. 새로운 인생이, 아니 고달픈 생이 시작된 거야. 하지만 괜찮았어. 너도 알잖아,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라는 말.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지. 나의 외모는 볼품없는 솔봉이 같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아늑한 공간에서 쾌적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꼭 필요했으니까.

 

하루는 여자가 나를 보더니 대뜸 가위를 가져와서 싹둑싹둑 내 몸을 두 동강 내는 거 있지. ‘아야아야’ 소리 질러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어. 축 늘어진 채 잘려나간 내 한쪽 어깨를 바라보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생각했어. 눈물마저 얼어붙고 고통의 파편들은 가위에 들러붙어 저항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어. 여잔 나의 온몸에 비누칠을 덕지덕지 해대더니 솥에 넣고 삶기 시작했어. 내 몸에 들러붙은 온갖 벌레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지 좀 시원한가 싶었는데 이번엔 빨래판에 대고 박박 이리 치대고 저리 치대며 나를 못살게 구는 게 아니겠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는지, 내가 허구한 날 괜찮다고 하니까 맘대로 해도 되는 줄 알았나 봐. 목숨이 끊어질 것 같은데 왜 이리 고통을 주는 걸까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더라구. 나를 두 동강 내어 목욕재계를 시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아픔을 참으며 기다렸지.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다행히 여자는 나를 끝내 버리지 않았어. 긍정의 힘이었을까? 내게 새로운 보직을 주더군. 과분하다 싶을 만큼 고마웠어. 나를 내동댕이치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먼지 닦는 일을 맡긴 거야. 책장이나 액자 틀을 서성이기도 하고 거실 테이블 위를 산책하기도 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지. 그래도 도란도란 얘깃거리가 한창인 화장대에서는 행여 방해될까 조심스러워 멈칫멈칫하게 돼. 그러다 쓰러진 로션 병이 눈이라도 슬쩍 흘기면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겠어. 너무 미안할 때면 오히려 아무 말도 못 하는 거 알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몰골이 얼마나 흉악한지 짐작도 하지 않았어. 우연히 거울에 설핏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지. 매일 씻고 또 씻어도 거무튀튀한 내 피부는 소득소득 말라 갔고 잔주름은 이제 짜글짜글해져 너덜거리기까지 했어. 어석더석한 나의 몸매만큼 내 마음에도 서글픔이 모락모락 올라오기 시작하네. 이제 내가 갈 곳은 없어진 것 같아. 그나마 이 일도 요즘은 물휴지가 대신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거실과 안방을 종횡무진 누비던 때가 그리워. 그때까지만 해도 난 어깨를 주욱 펴고 당당했지. 바닥에 들러붙은 주인 여자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일상의 파편들은 내가 모두 말끔하게 닦았으니까. 내 파트너인 떠벌이 청소기와도 호흡이 제법 잘 맞아서 가끔 그 녀석이 흘리고 간 부스러기들을 덤으로 얻을 때도 있었어. 인간이 주체하지 못하는 사소한 것까지도 내가 해결해 준 것처럼 난 작은 것 하나에도 자긍심을 가졌단 말이야.

 

나라고 늘 좋아서 괜찮다고 했겠어? 몸이 문드러지도록 아파도 내 일이려니 괜찮다 생각했고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자신에 자괴감이 들어도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서 말없이 지냈지. 그러니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힘들어도 난 그냥 괜찮다고 했어. 이 정도쯤이야 괜찮은 거라고 늘 생각했던 것 같아. 내가 숨이 차서 연신 물을 들이켜면서도 청소기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투덜거린 적도 없고 동글이 회전 걸레처럼 전기를 꽂아 달라 몽니를 부리지도 않았어. 사실, 정말로 괜찮았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냥 아파도 좀 참고 불편해도 양보하면서 살았던 거라구. 그래서일까. 아무도 날 돌아봐 주지 않더라?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땐 이미 난 혼자서 눈물을 삼키고 있었던 거야. 차라리 떠올리지 말 걸 그랬나 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더니 아무 투정 안 부리고 괜찮다고 했더니 정말 괜찮은 줄 알았나 봐. 내 꼴이 이게 뭐냐구. 구석에서 만날 군드러져 있어야 하다니. 이제라도 빨랫줄 가운데에 당당하게 오르고 싶어. 이런 내 맘을 주인 여자는 조금이라도 알까? 괜찮다고 다 괜찮은 건 아니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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