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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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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못하는 버릴 수 없는 버리지 못하는 버릴 수 없는 강현자 천지가 뒤집히는 것은 찰나였다. 거만하게 직립보행을 하던 한 인간이 순식간에 납작 엎드려 콘크리트 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육중한 무게의 추락은 무의식의 늪에서 꼿꼿하던 오만함을 무참히 꺾어버렸다. 줄지어 주차된 자동차들 뒤에서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보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누가 오기 전에 얼른 일어나야 한다. 양쪽 무릎과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 곳으로도 중심을 잡을 수 없어 한동안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몸살감기로 집에 누워있다가 겨우겨우 한의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몸살 기운에 정신이 혼미하여 어찌어찌 운전은 하고 갔지만 주차장 바닥의 배수 홈을 보지 못하고 걸려 그대로 엎어진 것이다. 엉거주춤 절룩거리며 들어간 내게 의사..
냄새와 향기 냄새와 향기 강현자 이제 철이 좀 드나 보군. 전원생활이라고 만만한 것은 아니지. 처음 이사를 왔을 때 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환경인데도 제법 적응을 잘하는 것 같더라고. 근데 그건 정말 아니었어. 어떻게 음식물 쓰레기를 줄창 내다 버릴 수가 있냐고. 들판 어디쯤 인적이 드문 곳에 버리면 자연히 썩어서 거름이 될 거라고? 천만의 말씀. 퇴비가 되기 전에 고라니와 들고양이, 들쥐들이 먹이를 찾아 늘 그곳을 뒤지지. 그러니 이웃 텃밭을 빠대고 다니며 망가뜨리니 그 음식물 찌거기가 들판의 무법자들을 불러들인 꼴이었어. 이제라도 한곳에 모아 잡초와 부엽토를 섞어 발효액을 넣고 퇴비를 만들기로 한 것은 참 잘한 일이야. 덕분에 나도 마음껏 숨을 크게 쉬며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어. 그런데 어제 보니까 삶은 완두콩..
유리벽과 나팔꽃 유리벽과 나팔꽃 강현자 나팔꽃이 피었다. 반갑다. 필까 말까 망설이다 피었는지 알 수 없지만, 주인의 무관심에도 꿋꿋하게 피어난 나팔꽃이 대견하다. 꽃이 어른 주먹만 하게 크니 보기만 해도 입이 절로 벌어진다. 몇 해 전 지인에게서 씨를 얻었는데 워낙 꽃이 크고 색이 고와 해마다 씨를 받아 화분에 심었다. 그러던 것이 작년에는 씨앗 둔 곳을 몰라 심지 못했었다. 올봄 우연히 씨앗 봉지를 찾아낸 것이다. 한 해를 묵은 씨라서 심을 때만 해도 과연 싹이 날까 의심스러웠다. 반신반의하며 며칠을 지켜보니 봄볕은 나팔꽃 화분에도 공평하게 은총을 베풀었다. 용케도 싹을 틔워 줄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밑동부터 맺혀야 할 꽃봉오리가 맺히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실망한 나는 연둣빛 이파리에나 만족하자 했다...
낯선 하루 낯선 하루 강현자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는 거미가 슬금슬금 줄을 탄다. 숨을 멈춘 듯 가만있다 갑자기 쭉 오르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 특별한 일정이 없어 여유롭게 커피나 마시자 했다. 마당으로 나가 벤치에 앉았다. 커피잔에 한 줌 햇살이 담긴다. 끈적한 장마가 턱 아래까지 왔으니 오늘 아침 같은 볕뉘가 왜 아니 고마우랴. 아, 얼마 만에 누려보는 한가로움인가. 이럴 때 언니에게 전화라도 해볼까? 막냇동생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난번 가족 단톡방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더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퍼뜩 스치는 것이 있다. 오늘인가? 다음 주인가? 19일인데 가만있자, 오늘이 19일이잖아. 맞나? 맞다. 아차 싶었다. 오늘이 아버지 기일인데 지나치리만큼 융통성 있는 친정집 장남이 낮 12시에 제사를 ..
누룽국 누룽국 강현자 khj5330@hanmail.net “오늘은 누룽국이나 해 먹으까?” 엄니의 이 말이 떨어지믄유, 지는 도망가구 싶었시유. 뻘건 짐칫국물두 싫었구유, 밀가루 냄시 풀풀 나는 것두 싫었시유. 왜 허구헌날 누룽국이냐 말여유. 씹기두 전에 후루룩 넘어가는 누룽국에는 겅거니라야 짠지배끼 읎는 규. 그맇다구 대놓구 싫다구 할 수두 읎었슈. 지는유, 즘심 때만 디먼 울엄니가 묵은 짐치만 늫구 누룽국을 끼리시는 기 무슨 취미인 중 알었어유. 푹 퍼진 국시를 국자루다가 둬 번씩 떠서 뱅뱅돌이 스뎅 대접에 담어 먹으믄유, 진짜루 국대접이 뱅뱅 돌었슈. 먹기 싫은 내 맴두 같이 뱅뱅 돌기만 했슈. 겨울이넌 메르치루 멀국을 맨들어설랑 짐치랑 국시만 늫구 끼리니께 뭐 딴 겅거니는 필요읎시유. 끼리기두 초간단 레..
이건 비밀입니다만 이건 비밀입니다만 강현자 3번 핀 자리가 빈 듯합니다.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아니랍니다. 내 눈이 이상해졌나? 멀쩡하게 있는 것도 보이지 않으니 핀을 제대로 맞힐 리가 없습니다. 자꾸 스플릿은 나고 스트라이크는 먼 얘기입니다. 아니, 스트라이크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에도 내가 속고 있는 것일까요? 볼링핀은 나를 속일 리 없지만,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나를 속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젯밤 채팅을 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운영자의 메시지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을 텐데 말입니다. 요즘 들어 동네에서 중고를 거래하는 당〇마켓 앱에 빠졌습니다. 책장이 필요해 며칠을 두고 지켜보는데 마침 내가 찾던 바로 그 책장이 나타났습니다. 자세히 보니 하자도 없고 쓸 만해 보였습니다. 아니, 누구나 보면 탐을 ..
소리의 비밀을 찾아, 진천 종박물관에서/한국수필 2023.1월호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다. 불리지 않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시인 하만스타인(Hamanstenin)의 이 말이 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며칠을 꼼짝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건만 그렇다고 막상 나서려면 이런저런 핑계가 발목을 잡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그랬고 딱히 갈 곳이 없기도 했다. 내게도 마음을 울려주는 종소리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날씨도 꾸물꾸물하니 밖으로 나다니기는 그렇고 실내면 좋겠다 싶었다. 진천을 오가면서 이정표만 보았던 ‘종 박물관’이 생각난 것은 순전히 하만스타인 덕분이다. 집을 나서기를 잘했다고 응원이라도 하듯 구름이 서서히 밀려나더니 햇살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어제 내린 눈으로 젖은 땅은 은빛 융단을 깔..
환희산에 안기다/2022.12 한국수필 발걸음 에세이 환희산에 안기다 -정송강사- 그가 누워있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산그늘마저 열기를 걸러내지 못할 만큼 푹푹 찌는 더위만 아니라면 단숨에 올라가도 좋으련만, 족자를 걸어놓듯 앞에 내걸린 오솔길을 오르자니 숨이 턱에 닿는다. 발끝을 보고 걷는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잣방울이다. 이미 도사리가 되어버린 잣방울이 아직 싱싱한 초록빛을 머금은 채 발길 뜸한 산길에서 애처롭다. 솔방울보다 걀쭉한 몸매는 고결한 선비의 모습이요, 이미 끝이 뾰족하게 선 잣방울 조각은 대쪽같은 그의 성품이지 싶다. 실하게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떨어진 잣방울의 모습에서 그가 떠오른 것은 어인 일일까. 강호(江湖)에 병(病)이 깁퍼 죽림(竹林)에 누었더니 관동(關東) 팔백리(八白里)에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聖恩)이야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