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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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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칼국수/충북수필 36집 장터 칼국수 강현자 오호라, 오늘이 장날이렷다. 진천 장에 가면 단골 칼국숫집이 있다. 몇 해 전 새로 단장한 전통시장으로 옮겨서 가게가 깨끗한데도 내겐 왠지 누추한 듯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 집을 드나든 지 벌써 10년이 다 되었건만 강한 첫인상 때문일까. 나로선 그럴 만도 하겠다. 찾아오는 손님들은 흙이 덕지덕지 묻은 장화를 신은 공사판 인부들이거나 허름한 점퍼 차림의 농군들이 대부분이었다. 세종대왕 한 장이면 두 사람이 엉덩이를 들이밀고도 시원 소주 한 병을 뉠 만큼 착한 국숫집이다. 기다리는 손님을 위함인지 찬바람을 막기 위함인지 비닐을 덧대서 넓힌 입구는 마치 움막 같았다. 장삿속 이문은 마음에도 없는 듯 할머니는 뒷방에서 연신 칼국수를 밀고 계셨다. 인정으로 빚은 손맛의 비밀이 뒷방에서 점점 ..
뒤로 가는 여행/내륙문학 57집 뒤로 가는 여행 강현자 “옛날 생각하믄 나이 먹은 겨.” 지난 추억을 자꾸 들먹이는 내게 작은어머니가 대뜸 하신 말씀이다. 언제부턴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의 나를 잊으려 했다. 향수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만져볼 수 없는 기억 조각들을 잡으려 애쓰는 나를 발견한다. 추억이란 호주머니 속에 감춰 놓은 사탕 같아서 몰래 혼자 야금야금 꺼내 보며 단맛을 즐길 수 있어 좋다. 지난 9월 느닷없이 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어렸을 때 살던 곳을 찾아 죽 둘러보잔다. 동생도 이제 나이를 먹는구나 생각했다. 인지상정인가 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형제들은 바로 좋은 날을 잡았다. 과연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변했을까? 많은 궁금증과 설렘을 안고 우리는 모였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까지..
바위 틈에 피는 꽃/무심수필 3호 바위틈에 피는 꽃 강현자 어디서 날아들었을까. 윤기 마른 화초 가운데 유독 맑은 연둣빛 작은 풀싹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이 채 가기 전 옅은 햇살이 창가를 서성일 때쯤이었다. 겨우 잎 모양을 갖춘 것이 이제 막 앞니가 나오는 아기처럼 앙증맞았다. 불청객치고는 귀엽고 여릿해 차마 뽑아낼 잡초감도 못 되었다. 키가 훤칠한 워킹아이리스 화분 그늘 안에서 언제까지 자랄 수 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뽑혀나갈 때 뽑히더라도 들판에서 버젓이 햇볕이나 달게 받고 튼실하게 행세할 일이지 어쩌자고 이곳까지 와 자리를 잡았을까. 가녀린 줄기에 맺힌 억척스런 생명력이 안쓰럽더니 어느새 뾰족한 꽃봉오리를 맺었다. 화분에 곁자리를 얻었으니 남의 집에 얹혀사는 기죽은 아이처럼 들판 제집에서만큼 튼실하..
함박꽃/무심수필 3호 함박꽃 강현자 함박꽃은 ‘순자’다. 서양에 장미가 있다면 동양에는 함박꽃이 있다고 할 만큼 화려한 꽃이라지만 볼 때마다 그 흔한 ‘순자’라는 이름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순하고 마음 넉넉한 이웃집 순자, 어디서나 만나면 방싯방싯 웃으며 다가올 것 같은 여자, 그러면서 늘 자신을 낮추는 속 깊은 여자 말이다. 호수공원에 함박꽃이 지천이다. 수채화인 듯 겹쳐진 꽃잎의 농담이 선연하다. 속살거리는 햇살에도 채 못다 핀 꽃잎 하나. 부끄러워 얼굴을 반쯤 가린 영락없는 순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꽃말이 수줍음인가 보다. 큼지막한 함박에 노른자를 체에 거른 듯 샛노란 꽃술이 포슬포슬하다. 차반에 집적대는 꿀벌들의 흥타령이 왁자하다. 수틀이 자리를 거지반 차지한 어머니의 방엔 화려한 색깔을 고루 갖춘 8자 모양의 작은..
불편한 동거/리더스 에세이 2021. 봄호 불편한 동거 강현자 ‘달그락….’ 무슨 소리지? 며칠 전부터 그는 고요한 틈을 타 슬며시 내게 노크했다. 평소에도 아둔한 편인 나는 그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처음에는 윗집에서 나는 소리인가 보다 했다. 그러다 어떤 때는 작은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별 것 아니려니 생각했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어디서 ‘투두둑’ 소리가 난다. 깜짝 놀라 뒤를 보니 던져진 그물을 삼킨 강물처럼 정적만 흐른다. 순간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디서 나는 것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귀며 눈이며 나의 온 말초신경이 곤두선다. 싱크대 어디쯤인 것 같기도 하고 세탁기 내부인 것 같기도 하고 식기세척기 안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
한국수필 2021. 3월호 자줏빛 억새꽃 강현자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세상 밖이 바이러스로 시끄러울수록 마음은 점점 바닥으로 침잠한다. 블랙홀을 거슬러 빠져나오듯 자전거를 타고 미호천으로 나갔다. 온몸으로 맞는 바람이 삽상하다. 답답함으로 달구어진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낸다. 자전거길 양옆으로 억새가 수굿하다. 지난봄 묵은 줄기를 밀어내고 밑동부터 차츰 초록으로 차오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꽃을 피우고 있다. 네모난 집 네모난 방안에서 몇 날 며칠을 보내는 동안 세상 밖은 저 갈 길을 분주히 가고 있었다.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난 결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이제 곧 미호천변은 온통 은색 물결로 넘실거리겠지. 벌써부터 설렌다. 가을볕을 담은 촘촘한 이삭이 수줍은 듯 모두 붉은빛을 띠고 있다. 보랏빛이 감도는 연한 자줏빛이라고..
막내의 반란 막내의 반란 강현자 강원도 속초 인근에 큰 산불이 났다는 뉴스다. 이번 화재를 키운 건 양간지풍(襄杆之風)이라고 한다. 봄철에 양양과 간성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부는 바람으로 십 수 년 전 낙산사를 불태운 바로 그 바람이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화재 현장에는 화마의 거대한 붉은 ..
때죽나무꽃처럼 때죽나무꽃처럼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늦은 오월 초록에 젖은 바람이 땀을 거두어간다. 미동산수목원 둘레길을 오르는 길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수다가 팔랑이는 나뭇잎 사이사이로 까르르 흩어진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내남없이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할 수 있어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산모롱이를 돌아 고개를 들어보니 푸른 숲 가운데 유독 하얀 꽃나무가 눈에 띈다. 소복소복 하얀 꽃이 마치 수묵화에서나 봄직한 굽은 가지마다 설핏하게 피었다. 하얀 꽃잎 가운데 노란 꽃술이 어울려 참 곱다. 줄기에서 뻗어나간 가지는 마치 벚나무처럼 울퉁불퉁하고, 무성한 초록 잎새에 가려진 꽃은 온통 하얗다. 산길을 따라 한 줄로 늘어선 나무가 히죽히죽 웃는다. 무슨 꽃일까 싶어 홀린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