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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수필

장터 칼국수/충북수필 36집

장터 칼국수

 

강현자

 

오호라, 오늘이 장날이렷다. 진천 장에 가면 단골 칼국숫집이 있다. 몇 해 전 새로 단장한 전통시장으로 옮겨서 가게가 깨끗한데도 내겐 왠지 누추한 듯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 집을 드나든 지 벌써 10년이 다 되었건만 강한 첫인상 때문일까. 나로선 그럴 만도 하겠다.

 

찾아오는 손님들은 흙이 덕지덕지 묻은 장화를 신은 공사판 인부들이거나 허름한 점퍼 차림의 농군들이 대부분이었다. 세종대왕 한 장이면 두 사람이 엉덩이를 들이밀고도 시원 소주 한 병을 뉠 만큼 착한 국숫집이다. 기다리는 손님을 위함인지 찬바람을 막기 위함인지 비닐을 덧대서 넓힌 입구는 마치 움막 같았다. 장삿속 이문은 마음에도 없는 듯 할머니는 뒷방에서 연신 칼국수를 밀고 계셨다. 인정으로 빚은 손맛의 비밀이 뒷방에서 점점 퍼져 나갔다.

 

어렸을 적 사촌 언니는 양은 양재기에 반죽을 했다. 세월의 더께를 닦아내느라 색이 허옇게 변한 양재기가 손길 따라 함께 들먹거렸다. 내 키만큼 기다란 홍두깨에 반죽을 말아 마른 가루를 솔솔 뿌렸다. 아기 엉덩이만 하던 반죽이 접시만 해지고 쟁반만 해지더니 점점 빛바랜 자주색 두레반상을 야곰야곰 차지해갔다. 볼 옆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팔뚝으로 쓸어 올리며 언니는 대가족을 위한 수고를 반죽 속에 꾹꾹 심었다.

겨울 날씨가 이상기온으로 포근하다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인지라 출입문을 여닫을 때마다 하얀 김이 문밖으로 우르르 밀려 나온다. 자리를 못 찾은 손님들도 덩달아 새어 나온다. 겨울바람에 푸석해진 야외 테이블에도 따뜻한 볕을 등에 지고 앉아, 파마머리 꼬슬한 아줌니들은 연신 어깨를 쳐가며 웃음보가 터진다. 빛바랜 머리칼이 드뭇한 촌로, 빨간 뻬니를 바르고 알록달록 스카프를 두른 할머니의 나들이를 부추기는 곳. 사석에서 온 성님과 이월에서 온 동상이 만나 악수하는 곳이다. 사돈의 팔촌까지 반가움이 모이는 곳이다. 모두가 이웃이고 형제다. 나도 눈치껏 빈자리 하나 잡아 슬그머니 한 발 들여놓는다.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모두 만나보겠네.’

둥글고 커다란 두레반상은 지구였다. 밀가루 반죽이 점점 밀려나서 두레반상 둥근 끝까지 닿으면 지구에서 떨어질까 아슬아슬하게 바라보았다. 칼국수를 밀 때마다 옆에서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안 부르려고 해도 자꾸 입에서 맴돌았다.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상상하면서. 그러는 사이 언니의 정성만큼 커다란 반죽은 엄마 치마폭만 하게 넓어졌다.

 

설겅설겅 푸릇한 배추겉절이와 곰삭은 김치, 조물조물 무친 아삭한 콩나물. 특별한 반찬이 없는 게 특별하다. 이미 옆 테이블에서 후루룩 소리만 들려도 군침이 고인다. 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아저씨의 공연한 투정에,

당신 입맛이 변한 규~.”

아이 달래듯 아줌니의 무심한 한 마디에 정이 묻었다.

 

마른 가루 뿌려가며 켜켜이 접어 쏭긋쏭긋 썰어가는 언니의 손은 마술사의 그것 같았다. 도마 위에 사선이 그어질 때마다 나의 눈도 따라갔다. 밖에서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꽁댕이가 남을 때까지 언니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고쿠락에서 노릇노릇 바삭하게 구워낸 꽁댕이는 언제나 기다림만큼 맛은 없었다. 누구보다 내가 차지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국수 꽁댕이는 달지도 고소하지도 않았지만 그저 마음만큼은 흡족한 맛이었다.

 

펄펄 끓는 솥에서 칼국수가 몸을 푸는 동안 숭덩숭덩 애호박도 함께 휘휘 유영한다. 얇은 스텐 대접에 국물이 넘칠 듯, 주인장의 엄지가 잠길락 말락 짧은 긴장감이 돈다. 드디어 뜨거운 김이 훅하고 얼굴에 들러붙는다. 그 흔한 바지락도 없다. 계란도 없다. 흐물흐물 푹 삶아진 밀가루 냄새 풀풀 나는 그야말로 전혀 치장이라고는 당최 없는 칼국수가 구수하다. 목구녕을 타고 넘어가는 멀국이 시원하다. 뱃속까지 뜨뜻하다.

 

언니가 밀어서 만든 칼국수는 모깃불 옆에서 땀을 줄줄 흘려가며 먹어야 제맛이었다. 가마솥에 후루룩 삶아서 애호박 송송 썰어 지랑물로 만든 다지기로 간을 맞추었다. 건건이라고 해 봐야 시어 터진 열무김치가 전부였다. 한여름 밤 뜨거운 칼국수에 맛깔스런 건건이는 바로 땀으로 꾀죄죄한 우리들의 꽁냥꽁냥 정겨운 이야기였다. 멀국까지 깨끗이 비우고 나면 모깃불은 사그라져 별을 만나고 우리들의 꿈도 덩달아 둥실 떠올랐다.

 

넥타이를 맨 사람은 없다. 말쑥한 정장 차림도 없다. 세련미라고는 뒷전인 사람들이 먹는 그야말로 꾸밈없는 음식이다. 수수한 사람들이 먹는 담백한 맛이다. 구수한 멀국에 미끄러지듯 목구녕을 넘어가는 면발. 이렇다 할 건건이가 없어도 정으로 먹는 소박한 맛이다. 다랭이골 선배는 어느새 은골 사는 후배의 국숫값을 대신하며 괜찮여~”를 연발하는 가슴 따순 맛이다. 너도나도 추억을 먹는 맛이다.

 

굵기도 제각각인 언니표 칼국수는 젓가락질이 어설픈 내겐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금도 기계로 뽑은 미끈한 면발보다 구불구불 제멋대로 빚어진 면발이 더 맛이 좋다. 가리사니 잘 잡는 사람보다 어수룩한 사람에게 정이 더 가듯이 말이다.

 

혀로 느끼는 맛보다 마음으로 먹는 꽁댕이의 맛이 흡족했듯이, 봉창은 얇아도 사람 사는 인정이 도타운 맛이다. 시끌벅적 장터 칼국숫집에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푸근한 정이 보슬보슬 피어난다. 혀끝에 남은 아쉬움에 입가심하기도 아까운 맛이다. 한 대접을 다 비웠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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