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수필

뒤로 가는 여행/내륙문학 57집

뒤로 가는 여행

 

강현자

 

옛날 생각하믄 나이 먹은 겨.”

지난 추억을 자꾸 들먹이는 내게 작은어머니가 대뜸 하신 말씀이다. 언제부턴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의 나를 잊으려 했다. 향수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만져볼 수 없는 기억 조각들을 잡으려 애쓰는 나를 발견한다. 추억이란 호주머니 속에 감춰 놓은 사탕 같아서 몰래 혼자 야금야금 꺼내 보며 단맛을 즐길 수 있어 좋다.

지난 9월 느닷없이 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어렸을 때 살던 곳을 찾아 죽 둘러보잔다. 동생도 이제 나이를 먹는구나 생각했다. 인지상정인가 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형제들은 바로 좋은 날을 잡았다.

과연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변했을까? 많은 궁금증과 설렘을 안고 우리는 모였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진 못해도 오남매가 모두 공유했던 곳이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되돌아보니 이사도 퍽이나 여러 번 다녔다. 그만큼 힘들었을 부모님과 지금의 우리를 견주어보며 훈장이라도 달아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성동 향교 앞에 살던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린 모두 아연실색했다. 그동안 살던 사람들의 사연이 힘에 부쳤을까. 폭삭 내려앉은 집을 보며 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형체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어 반가웠지만 무너진 집채만큼 우리의 가슴도 무너져 내렸다. 깨진 벽돌 조각 틈바구니에도 어릴 적 추억은 고스란히 살아있었고, 무너진 기왓장 사이로 지나간 세월의 기억들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다섯 남매 키우시느라 늘 까랑까랑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듯했다. 추레한 옛집을 보니 우리는 부모 잃고 덩그러니 남아 있는 아이들 같았다.

모충동 집은 달랐다. 사십 년 넘은 세월이 어디 갔나 싶게 멀쩡하다. 동네 주변엔 많은 집이 들어서서 우리의 옛 둥지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우린 쉽사리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릴 적 모습 그대로를 재연하며 사진을 찍는 나이 오십 넘은 동생들 얼굴에서 개구쟁이 모습이 묻어난다.

한 뿌리 한 나무에서 제각각 여러 갈래의 나뭇가지로 살아왔다. 가지에 가지를 치면서 비바람에 흔들리고 나뭇가지가 꺾여도 옆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이었다. 해마다 새로운 잎을 매달듯이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 속에 어느새 우리는 점점 멀리 제 갈 길을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지친 발걸음을 이쯤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함께 할 추억이 있고 함께 할 형제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하고 기쁜 일인가.

취미생활 하듯이 부부싸움이 잦았던 부모님, 그 안에서 겪어야 했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상처가 원망에서 지금은 이해할 만큼 세월이 흘렀다. 부모님께 야단맞고 쭈그려있던 그때의 심정을 털어놓으며 저마다 속내를 드러내 한바탕 웃었다. 바람 잘 날 없던 나뭇가지들이 그때의 아우성을 지금은 부끄럽다 말한다. 늘 부족하고 늘 배가 고팠던 그렇게 시난고난했던 시절도 이제 와 돌이켜보니 나름 사금파리 같은 작은 행복이 묻어있었다. 이토록 지나온 길을 안온하게 포장해주는 것은 뒤로 가는 여행이 주는 참맛 때문이 아닐까.

 

 

 

대성동 #1

봉출네

 

우리 바로 앞집엔 봉출네 가게가 있었다. 큰딸 이름이 혜경이기 때문에 혜경이네 가게라고들 했지만, 혜경이 엄마는 틈만 나면 큰딸보다 둘째딸 봉출이를 불러댔다. ‘봉출아~, 봉출아~.’ 아줌마는 봉출이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서 나는 봉출네 가게라고 불렀다.

근동에는 별다른 가게가 없어서 봉출네는 늘 붐볐다. 내가 두부 심부름을 가면 명희 할머니는 막걸리를 사러 왔다. 손과 발과 입을 동시에 움직이는 걸진 목소리의 아줌마는 그야말로 여장부였다. 가끔 손님하고 셈이 안 맞아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찰그락 찰그락 주판알이 봉출이 아줌마를 대변했다. 봉출이 아줌마가 조용한 때는 아침 햇살이 가게 진열대에 슬며시 내려앉을 때였다. 아버지가 출근하며 주신 동전 오 원을 들고 나는 아침마다 출근 도장 찍듯이 그곳을 드나들었다. 번데기 과자와 솜과자 사이에서 한참을 망설여도 채근하지 않으셨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번데기 과자 여덟 개를 정확하게 세어서 주셨다.

가게 기둥에는 귀퉁이가 닳아 찌든 공책과 때 묻은 반창고를 두른 볼펜이 까만 고무줄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손님들에게는 신용의 담보였고 아줌마에게는 인정의 징표였다. 가끔 나도 엄마 심부름 갈 때, ‘외상이래요.’ 하면 아줌마가 고무줄을 당겨 적는 모습을 보아오곤 했다.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엄마는 봉출네 외상값 걱정부터 하셨지만 그래도 외상장부가 깨끗하게 지워지는 날은 드물었던 것 같다. 외상값을 갚는 날엔 엄마 손에 과자 한 봉지가 들려서 오곤 했다.

봉출네 가게에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다 있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솜사탕, 바삭바삭 고소한 바가지 과자, 쫀득쫀득한 쫀드기 등. 6월이면 연둣빛 새콤한 자두, 7월이면 당원에 재운 풋복숭아가 나를 끝없이 유혹했다. 풋과일을 너무 먹어 토사곽란이 날 거라는 엄마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숫제 우리도 가게를 차리자고 졸라대곤 했다. 그러면 엄마도 외상값 걱정을 하지 않을 거라면서.

점심때가 지나 쟁쟁하던 햇살도 슬며시 고개 숙일 즈음이면 집집마다 하나, 둘씩 가게로 모여들었다. 각자 들고 온 넋두리건 자랑이건 봉출이 아줌마는 함께 장단을 맞추었다. 누군가 부부싸움 한 이야기보따리를 끄르면 한편이 되어주고 자랑거리를 슬며시 내민 이에게는 부러움과 칭찬으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누구는 ~카더라.’는 얘기에 시비가 붙으면 아줌마는 발 벗고 나서서 중재했다. 한마디씩 던지고 가는 동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제일 바쁜 사람은 봉출이 아줌마였다. 봉출네 가게는 동네 방송국이고 상담실이자 사랑방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면 한마디씩 찬거리 걱정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가게는 더욱 분주해지고 아줌마의 봉출아, 봉출아~’가 시작되면 봉출이 언니는 우리와 놀다 말고 가게로 달려갔다.

가장 인기 있는 찬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뭐니 뭐니 해도 콩나물이다. 커다란 통에 수북이 쌓인 콩나물을 열 손가락으로 주섬주섬 추스르면 까만 콩 껍질은 아래로 내려앉아 깨끗하게 솎아졌다. 봉출이 아줌마는 신문지를 북 하고 찢어서 펼친 다음 손으로 노란 콩나물을 푸짐하게 집어 그 위에 올렸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한 번씩 접은 다음 둘둘 말면 완벽한 포장이다. 이때 한 줌 더 얹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한 줌의 덤은 단골에 대한 인심이자 넉넉한 정이었다. 콩나물 한 줌에 마음은 더 풋풋해지고 집집마다 저녁상은 더 푸짐해졌다.

유기농인지 무농약인지 정확하게 계량되어 가격표가 붙은 비닐봉지 속 요즘 콩나물보다, 십 원어치 어중간한 계량으로 인정을 덤으로 얹어주던 콩나물은 참 고소했다. 지금도 신문지에 싸서 파는 콩나물 어디 없을까?

 

 

대성동 #2

꽁치

 

어디서 나는 냄새지?”

나는 놀다가도 콧구멍을 발심 거리며 갑자기 시장기를 느꼈다. 운 좋게 냄새의 근원지가 우리 집이라면 그런 날은 엄마의 목소리도 나긋나긋 표정도 밝으셨다. 두어 군데 칼집을 낸 꽁치가 석쇠 위에서 앞뒤로 몸을 뒤척일 때, 자글자글 기름이 연탄불 위로 떨어지면 타닥타닥 붉은 불꽃이 솟아오른다. 꽁치는 불기운의 간지럼을 이기지 못하고 헤죽헤죽 제 피부를 노르스름하게 벌름거린다.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나는 꽁치입네.’ 하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면 밖에서 놀던 나는 냅다 뛰어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우리 세 자매는 이때만큼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척척 상을 펴고 반찬을 나르고 수저를 놓았다. 꽁치가 밥상 위로 입성하기 전 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일이 있다. 신문지를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잘라서 우리 수저 옆에 하나씩 놓아 주시는 거다. 가시를 발라 놓게 하기 위함이다. 자로 잰 듯 네모반듯한 신문지는 우리집 규범이었다. 그 신문지를 받아야 우리는 수저를 들곤 했다. 누구도 거역해본 적 없는 아버지가 정한 규율 때문이다. 꽁치를 먹을 때마다 치르는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엄마를 위한 배려였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는 이 일을 한 번도 거르신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의 군대식 습관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그때는 다른 집도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지금도 나는 생선을 먹을 때 항상 가시 발라 놓을 휴지를 옆에 마련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꽁치를 먹을 때마다 가장 애를 먹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언니들은 제법 요령껏 잘 발라 먹을 수 있고 동생들은 어리니까 엄마가 직접 가시를 발라주셨지만, 젓가락질이 어설픈 나는 혼자서 가시를 바르다가 목으로 그냥 넘기기 일쑤였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컥컥거리면 김치 얹은 밥 한술을 씹지 않고 꿀꺽 삼켜야 하는데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몇 번 시도하다 물과 맨밥으로 배만 불리곤 했다. 숟가락을 놓고도 한참을 목에 걸린 가시 때문에 성가시기도 했지만 그래도 꽁치를 먹는 날은 잔칫날 같아 좋았다.

꽁치처럼 특별한 반찬이 상에 오르는 날은 밥상 위에 젓가락질이 난무했다. 허공에서 젓가락이 부딪치면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항상 언니가 빨랐다. 내가 찜해놓은 꽁치는 언니가 먼저 가져갔고 내 몫을 밥공기에 얹어놓으면 동생이 떼를 썼다. 질세라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다른 사람 손놀림까지 눈알을 굴리며 살펴보았다. 그렇다고 밥상머리에서 언성이 높아지거나 싸움이 일거나 삐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각자 제 입에 넣기 바빴으니까.

고솜고솜하면서 입안에 감도는 비릿한 맛을 잊을 수 없다. 등 쪽 짙은 살은 담백해서 좋고 하얀 배 쪽에 기름진 살은 고소하고 부드러워 좋다. 가끔 꽁치 알이 나오면 그건 내 몫이어야 했다. 입안에서 오돌도돌 톡톡 터지며 씹히는 식감은 맛을 넘어 재미까지 더해 주었다.

꽁치 굽는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차면 왠지 편안하고 훈훈했다. 가족이 함께 있다는 안정감이랄까 온화함이랄까. 꽁치는 행복을 긷는 마중물이었다. 요즘은 이웃에 번질 냄새가 부담스러워 외식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예전에 비해 구하기도 쉽고 크기도 커졌는데 맛은 그전만 못하다. 옛날의 자글자글하고 고졸한 그 맛을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반찬 가짓수보다 많았던 우리들의 왁자지껄 재잘거림이 더 맛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혼밥이 유행처럼 되어버린 요즘에 비하면 내가 아끼려 남겨 놓은 꽁치를 동생이 홀딱 먹어서 속상해하던 그때가 그래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대성동 #3

홍시

 

복순 언니네 은행나무도 이제 하얗게 팔뚝만 드러내고 서 있었다. 거리엔 찬바람이 휴지 나부랭이들을 이러 저리 끌고 다녔다. 결석을 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던 어느 늦가을이었다. 한 삼일 학교도 못 갈 정도로 독감에 몹시 시달렸다. 평소 같으면 밖에 나가 고무줄놀이며 술래잡기, 지남철 놀이까지 다 하고 해가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텐데 누워 있는 며칠 동안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열병이 좀 가라앉자 밖이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터라 도저히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술은 하얗게 마르고 입안은 쓴맛이 진동했다. 그렇게 누워 있은 지 3일째 되던 날, 아버지께서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비밀스럽게 귓속말을 건네셨다.

뭐가 제일 먹고 싶은지 말해봐. 아버지가 언니들 모르게 너만 사줄게.”

은밀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새어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이건 분명 비밀이었다. 무얼 먹고 싶은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언니들 모르게 나만이라는 게 중요했다. 비밀작전은 왠지 신속해야 할 것 같았다.

홍시감!”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아버지께서는 곧바로 나가셔서 하얀 봉투에 든 빠알갛고 말랑말랑한 홍시 세 알을 들고 오셨다.

언니들 오기 전에 어서 먹어.”

아버지의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는 우리 둘만의 작전을 수행하는 신중함 그 자체였다. 냉큼 한 입 베어 물었다. 열병으로 메말라 버린 입술에 닿는 상쾌한 차가움, 아기 볼처럼 말랑말랑한 감촉, 얇으레한 살갗에 가려진 보드라운 진홍빛 속살. 입술을 대고 쭉 빨았다. 물컹 달려와 씹을 것도 없이 목으로 넘어간다. 입안 가득 달큰하다. 하늘이 내린 맛이다. 장마 때면 바닥에 흩어진 도사리에 안타까워했고 늦가을 힘없이 떨어져 푹 터져버린 홍시에 군침을 흘리던 때가 있었다. 괄괄한 더위와 쟁글쟁글한 땡볕을 받아 찬바람 이는 나뭇가지에 끝까지 버티고 남은 홍시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완벽한 맛이었다. 차가운 홍시는 온몸을 싸고도는 열감을 모조리 앗아갔다. 아무 말이 필요 없었다. 곧바로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친구들이 놀고 있는 골목으로 달려나갔다.

허이구! 홍시가 먹고 싶어 꾀병이었구먼?”

하시는 아버지의 미소 섞인 한마디를 등 뒤에 남긴 채.

그날의 일은 5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간직된 소중한 사건이었다. 5남매 중 가운데 셋째 딸로 자라면서 큰언니처럼 첫째라고 귀여움을 독차지한 적도 없었고 둘째 언니처럼 나도 예뻐해 달라고 시샘을 부릴 줄도 몰랐으며 남동생처럼 장남이라 특별대우를 받은 적도 없었다. 막내도 아니었으니 어리광도 통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있는 듯 없는 듯 말썽 없이 혼자 노는 아이였다. 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내게 아버지는 그날 한껏 특별대우를 해 주신 것이다. 그것도 나만을 위하여.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아버지의 이러한 비밀작전은 동생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나만을 위한 아버지의 그날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대성동 #4

걸어서 사십 리

 

내 나이 열 살, 해토머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돋을 양지를 찾아 볕을 쬐던 옆집 은주와 나는 특별히 놀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문득 전에 살던 시골 작은집 생각이 무지개 되어 가슴에 걸리었다. 그곳에 가면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걸어서 가보자고 내가 먼저 은주를 꼬드겼다. 자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버스를 타고 여러 번 다녀봤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는 작은집 가는 길이 훤히 그려져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버스에 씌어있는 글자를 하나하나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책에서만 보던 글자들이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게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전에 타본 버스를 알아보면 반갑고 신기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우리들 눈에는 모든 것이 신나는 파릇한 봄이었다. 봄 나비가 되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걷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영운동을 지나 교외로 나오자 버스를 탔을 땐 뒤로 달리던 미루나무 가로수가 그날은 모두 제자리에 얌전히 서 있었다. 가는 길에 상수도 정수장에 들러 네모난 틀에 가두어 놓은 시퍼런 물을 한참 구경하기도 했다. 보이는 것마다 신기하고 우리끼리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어른이 된 듯했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우린 다시 걷고 또 걸었다. 펄펄 끓는 용광로처럼 무모한 행진은 계속되었다.

엄청 많이 걸은 것 같은데 눈에 익은 풍경을 보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츰 은주가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방죽도 나오고 가게도 나올 거라는 걸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발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앞만 보고 걸었다. 가끔 버스가 보란 듯이 우리 곁을 쌩 하고 지나갔다. 까마득히 따라오던 버스가 금세 점점이 사라졌다. 그제서야 속도의 차이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비교 상대가 옆에 있어야만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인가. 집을 나선 것이 후회되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이다.

고은 삼거리에서 화당까지의 자갈길은 참 넓고 반듯했다. 길 양옆으로는 황량한 논바닥이 봄 하늘 아래 납작 엎드려 있고 미루나무 가로수만 하얗게 버티고 있었다. 덜컹덜컹 버스가 일으킨 뿌연 먼지가 우리를 훑어댔다. 운이 좋으면 화당까지 버스를 타고 왔던 때도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동화초등학교, 동화사, 그 옆에는 남선이다. 걸음은 점점 무거워 주저앉고 싶었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쳐 가는 은주를 달래가며 겨우겨우 동화사 앞까지 왔을 때다. 산에서 돌을 캐는 작업을 하시던 작은아버지가 우릴 발견하시곤 황급히 뛰어 내려오셨다. 작은아버지의 분위기가 어쩐지 이상했다. 무척 황당해하시며 서두르셨는데 그래도 혼을 내지는 않으셨다. 우릴 서둘러 집으로 데려가 저녁을 먹게 하셨다. 자칫해서 막차라도 놓치면 안 될 일이었다. 그 시절엔 전화가 없었으니 기다리는 가족들 걱정을 하신 게다. 저녁을 먹자마자 그 길로 작은아버지 손에 이끌려 다시 화당으로 나와 버스를 탔다. 작은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올 생각을 했냐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다음에 올 때는 절대로 혼자서 오지 않기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시골에 가면 신나게 놀겠다던 나의 철없는 바람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었다. 온종일 걸은 사십 리 길이 허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황당한 사건은 어른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고 스무 살이 넘도록 나는 걸어서 시골에 간 아이로 불렸다

이제 와 생각하니 우리의 인생길이 사십 리 안에 다 있었다. 집을 처음 나설 때처럼 패기 넘치고 당당하던 청춘이 있었고 꿈과 희망을 찾아 앞만 보고 달리던 피 끓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 때론 지치고 쓰러져도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했던 때가 있는가 하면 그 와중에 골짜기에 샘솟는 옹달샘처럼 짬짬이 희망을 건지며 위안을 삼던 때도 있었다. 결국은 작은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도로 집으로 왔듯이 삶이란 것이 내가 했던 만큼 모두 거두는 것은 아니란 것도 지금은 안다. 하지만 내가 가는 길이 신기루를 쫓는 길이라 해도 나는 계속 걸을 것이다. 내가 힘들게 걸었을 때 작은아버지가 구세주였던 것처럼 혼자서 가는 길에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지친 몸을 뉘였을 때의 아늑한 내 집이 있었던 것처럼 내 마음 쉴 곳이 있을 거라 믿고 싶다.

 

 

 

'발표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덧니  (0) 2021.08.30
장터 칼국수/충북수필 36집  (0) 2021.03.14
바위 틈에 피는 꽃/무심수필 3호  (0) 2021.03.14
함박꽃/무심수필 3호  (0) 2021.03.14
불편한 동거/리더스 에세이 2021. 봄호  (0) 2021.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