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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수필

이건 비밀입니다만

이건 비밀입니다만

 

강현자

 

 

3번 핀 자리가 빈 듯합니다.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아니랍니다. 내 눈이 이상해졌나? 멀쩡하게 있는 것도 보이지 않으니 핀을 제대로 맞힐 리가 없습니다. 자꾸 스플릿은 나고 스트라이크는 먼 얘기입니다. 아니, 스트라이크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에도 내가 속고 있는 것일까요? 볼링핀은 나를 속일 리 없지만,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나를 속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젯밤 채팅을 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운영자의 메시지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을 텐데 말입니다.

 

요즘 들어 동네에서 중고를 거래하는 당마켓 앱에 빠졌습니다. 책장이 필요해 며칠을 두고 지켜보는데 마침 내가 찾던 바로 그 책장이 나타났습니다. 자세히 보니 하자도 없고 쓸 만해 보였습니다. 아니, 누구나 보면 탐을 낼 만했습니다. 이럴 때 망설이면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지요. 서둘러야 합니다. 그런데 올라온 문구가 가관입니다.

산다고 하고 잠수 타는 사람, 사겠다고 예약 잡고 이것저것 따지는 사람, 채팅으로 간만 보고 무응답 하는 사람들이 많아 짜증이 나니, 거래 날짜 잡고 예약하실 분은 절반 선입금을 받고 거래하겠습니다.’

올린 글에 화가 잔뜩 묻었습니다. 아마도 여러 번 곤혹을 치렀던 모양입니다. 나야말로 확실한 사람이니 얼른 채팅을 시도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내가 아무리 빨라도 늘 나보다 먼저인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지요.

벌써 누군가 이틀 뒤에 가져가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포기해야 하나? 아까운데.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 먼저 선입금하는 사람에게 팔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선뜻 절반을 당장 입금하겠노라 했더니 곧바로 계좌번호를 보내왔습니다.

 

열세 개의 번호가 숨도 고르기 무섭게 마켓 운영자로부터 메시지가 훅 끼어들었습니다. 상대에게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라면서 선입금을 요구하면 사기일 수 있으니 직거래를 하랍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요. 무엇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뜨끔합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가림막이려니 고마우면서도 한편 달갑지가 않습니다.

갑자기 손이 멈칫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미 보내기로 약속을 했는데. 입금 확인을 위해 모니터를 뚫어져라 쏘아 보고 있을 상대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뾰족한 수가 얼른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물건을 놓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냥 보낼까? 아니지. 지난번 보이스피싱 때도 현금인출기에 뜨는 메시지를 무시했다가 변을 당하지 않았던가. 설마 이런 대푼으로 사기를 칠까? 큰돈도 아닌데 속는 셈 치고 송금해보자. 아냐, 원래 중고 거래는 직접 만나 맞돈으로 주고받는 것이 맞다. 어떡하지? 난 그 책장이 꼭 필요한데.

 

내가 원하던 그 물건이 물거품이 아니길 바라면서 나의 손가락은 이미 열세 개의 숫자를 터치합니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운영자는 안타까워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내 일 인걸요. 그리고 사기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마음은 이미 기울었고 나는 이체버튼을 눌렀습니다. 이내 기다렸다는 듯이 그쪽으로부터 확인했다는 답이 왔습니다. 내일 오전에 연락을 다시 하기로 하고 대충 시간 약속을 받았습니다. 예약을 해 놓고도 이렇게 불편할 수가 있을까요.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게 되었다는 기쁨은커녕 이번에도 또 맥없이 당하는가 싶어 안절부절입니다. 남의 말을 쉽게 믿는 편이어서 큰코 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어쩌면 진짜 사기꾼일지 몰라. 나처럼 어수룩한 사람들만 모아서 사기를 치는지도 모르지. 혹시 이틀 후에 예약을 받았다던 얘기도 거짓인지 모릅니다. 나를 꼬드기기 위한 미끼였을지도요. 그러고 보니 나와 예약을 했으면서 예약중이라는 표시를 내걸지 않는 것도 미심쩍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나 같은 사람을 찾아 쇠푼을 그러모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괘씸한 노릇입니다.

아니야, 분명 아파트 이름까지 알려줬어. 그 아파트는 확실히 존재하는 아파트였어. 혹시 거짓으로 아무 데나 둘러댄 것 아닐까? 두고 보면 알겠지. 이건 순전히 모험입니다.

 

내 차례가 되어 레인 위로 올라서서도 사기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앞이 희뿌옇습니다. 옆 사람은 전과 같지 않게 자꾸 스플릿을 내는 내게 코치를 해주지만 헛수고입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모두 파이팅을 하며 하하 호호하는데 내 표정만 건성입니다.

 

정말 내가 당한 것일까요? 사기꾼에게 쉽게 놀아나는 자신이 한심스럽습니다. 나는 늘 왜 이 모양일까요? 아니, 사람을 잘 믿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의심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기와 사기가 아닌 것의 차이를 도무지 분간하지 못하겠단 말입니다. 만약 이번에도 내가 당하는 것이라면 그동안 주고받았던 채팅 내용을 공개해서라도 어느 대목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떻게 해야 했는지, 누구라도 붙잡고 조언을 구해 볼 참입니다. 나도 내가 답답합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매번 속고 사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겁니다.

아마도 내게 들러붙어 있는 탐심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 욕심을 가진 사람이 어디 나뿐인가요? 욕심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약한 것이 문제인지 모릅니다. 상대에게 당차게 둘러대지도 못하고 위기를 모면하려는 순발력도 없습니다. 너무도 정직하게, 곧이곧대로, 융통성도 없이,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실천하는 범생이.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을 것이라고 믿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누구는 의심부터 한다는데 나는 우선 믿고 봅니다.

 

어느덧 볼링 게임은 끝이 나고 모두 식사를 하러 갈 즈음 나는 서둘러 볼링장을 나왔습니다. 진정 내가 바보짓을 하는 것일까? 미리 출발하여 근처까지 가도록 아무 연락이 없으면 허탈하게 되돌아올 바보 같은 나를 상상해 봅니다. 차라리 회원들과 화기애애하게 식사나 하는 편이 옳지 않았을까? 운전석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엽니다. 과연 반응이 올까? 손가락이 떨립니다.

지금 출발합니다. 몇 동으로 갈까요?’

 

‘102동 앞으로 오세요.’

 

바로 답이 왔습니다. 가시덤불을 거두어내듯 복잡했던 머릿속이 훤해집니다. 그곳을 향해 차는 미끄러지듯 달립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초가을 맑은 바람이 내 마음의 찌꺼기를 씻어냅니다. 지옥을 벗어나 천당으로 가는 길입니다.

도착해서 보니 부부인지 남매인지 너무도 예쁜 두 젊은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분해한 책장을 가지런히 묶어서 조심조심 건네며 부품과 함께 조립하는 방법도 상세하게 일러줍니다. 말하는 품새로 보아 퍽이나 애착을 갖고 써왔던 듯합니다. 이제 필요 없어 처분한다면서 잘 쓰셨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인사하는 모양새도 수굿합니다. 어제 만 오천 원을 입금하고 나머지 만 오천 원을 건네려니 삼천 원을 깎아주겠답니다. 세상에 이런.

 

돌아오는 내내 가을 햇살이 내 마음처럼 따사롭습니다. 책장을 조립하는 구멍마다 나사가 빙글빙글 잘도 맞아 돌아갑니다. 세상 모든 사람, 모든 일이 이렇게 부드럽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의심의 삐걱거림이 없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군걱정 하느라 진이 빠진 건 둘째치고 함부로 의심한 젊은이들에게 미안한 이 마음은 어찌할까요.

 

!

그 젊은이들에겐 비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