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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수필

어머니의 섬 / 2022 한국수필 작가회

어머니의 섬

강현자(khj5330@hanmail.net)

 

육거리 시장에 갔다. 참 오랜만이다. 생각보다 말쑥해진 시장 풍경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왠지 낯설다. 전에 없던 골목이 더 생긴 걸까? 예전의 기억을 더듬느라 걸음이 자꾸 뒤처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된장 끓는 냄새를 따라간 식당에 둘러앉았다. 보리밥에 수다를 함께 넣어 쓱쓱 비비며 모처럼의 외출에 환호했다. 너무 흥분한 탓일까.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민망해진 우리는 얼른 주인에게 사과했다. “괜잖어유~ 아직 지구대에서 연락 안 왔슈.” 하며 쥔장은 농으로 받아넘긴다. , 지구대. 맞아, 그때도 육거리 시장이었지. 여기 어디쯤이었을 게야. 두려움에 떨던 여섯 살의 어느 날이 가슴에 와 앉는다.

 

육거리시장 근처 남문로에서 살 때였다. 엄마가 시장에 다녀올 테니 집에 잠깐 있으라 했다. 혼자 놀다 지루해진 나는 엄마를 찾아나섰다. 엄마를 따라 몇 번 가본 적이 있으니 그곳에 가면 엄마가 있을 터였다.

시장통에 들어서자 풀빵 냄새도 여전했고 시원한 빙수 가게도 눈에 익었다. 좌판을 펴고 앉아 있는 아줌마들도 전과 똑같았다. 엄마 손을 잡고 함께 다니던 길을 따라 두리번거리며 앞으로 앞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 아는 길 같았는데 가보면 막다른 골목이고, 돌아서 나오면 전혀 낯선 곳이었다. 엄마는 안 보이고 나만 덩그러니 섬이 되었다. 깊고 어둑한 바다 한가운데 있는 양 나는 그만 제자리에 서서 울어버렸다.

 

낯선 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간 곳은 파출소였다. 울면 잡아간다는 순사들이 있는 곳이 아닌가. 나는 울음을 꿀꺽 삼켰다. 엄마 말대로 얌전히 집에 있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친절한 순사 아저씨들은 내가 좋아하는 과일과 과자를 건네며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이렇게 많은 과자를 독차지하긴 처음이었다. 꼬질한 눈물 자국은 어느새 웃음꽃으로 피었다. 그사이 방송을 들은 엄마가 나를 찾으러 오셨는데도 엄마 품에 와락 안기기는커녕 아저씨들이 순사라는 것도 잊은 채 노느라 정신이 팔려있었다. 놀란 가슴 달래며 달려오신 엄마는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요즘엔 내가 엄마를 찾으러 간다. 몇 년째 요양원에 계신 엄마는 여섯 살이 되어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시다. 지금은 어디쯤 가 계신 걸까? 자식들 이름도 당신의 나이도 남편의 이름도 모두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내가 길을 잃고 낯선 골목으로 들어섰던 것처럼. 겨우겨우 막내딸 이름은 부르시지만 그마저도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낱에 불과하다.

요양원에 가시기 직전 늬 아부지 죽으면 그 연금 내가 혼자 마음대로 쓸란다.” 하시는 바람에 모두가 놀란 적이 있다. 억눌렸던 꿈을 잠시라도 이루어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었다는 것을 그땐 아무도 이해 못 했다.

 

꿈이 왜 없으셨을까. 그 좋은 솜씨로 번듯하게 식당이라도 차려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 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박봉에 지쳐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나려 이리저리 묘안을 내보아도 번번이 남편이라는 관념의 벽에 부딪혔다. 영화배우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치 고왔던 어머니의 미소 속에는 이뤄보고 싶은 꿈도 가득했으리라.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꿈보따리를 내려놓게 했다. 당신에게도 꿈이 있노라고 말이나 제대로 해 보신 적이 있을까?

 

평생을 일 년같이 일 년을 하루같이, 그렇게 일생을 꿈을 잃고 헤매다 도착한 곳은 깜깜한 절벽 앞이었다. 무엇 하나 당신 뜻대로 결정하고 도전해본 것이 없다. 꿈을 접어야 할 때마다 스스로 마음 다스리기를 얼마나 많이 하셨을까.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 여승의 슬픈 사랑이 애달파 평생 애창곡으로 삼으시더니 지금도 가사를 기억하실 만큼 여전히 소녀 감성이시다. 굴곡진 삶을 지고 간다는 것이 심성이 여린 한 여인에게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가로막힌 벽 앞에서 의지할 곳이라곤 서랍 속 신경안정제와 싱크대 아래 감추어둔 소주뿐이었다.

 

돌너덜길을 헤매다 겨우 다다른 곳이 망각의 섬이다. 돌이켜 세워줄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 어머니가 누워 계신다. 엄마는 막내딸을 찾으러 파출소로 달려오셨지만 딸은 어머니를 찾으러 갈 수가 없다. 남편도 자식도 세상 그 누구도 당신 편이 없었음을 원망이라도 하듯이 점점 멀리 가버리신다. 어머니의 섬에는 내가 모르는 당신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일까? 안타까워하는 나와 달리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없으시다. 순사 아저씨들과 노느라 엄마를 외면한 여섯 살 막내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식도 남편도 아닌 어머니의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 생명줄처럼 묵주를 붙잡고 오늘도 주기도문을 외시겠지. 어머니를 대신 보낸 신만이 어머니를 망각의 섬에서 구원하시리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2022 한국수필 작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