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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수필

나르시스가 기다린 님프 / 수필과 비평 2022 11월호

나르시스가 기다린 님프

오해와 진실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헤라의 저주가 아니었다면 에코는 사랑을 이루었을지 모른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에코도 나르키소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마음과는 다르게 메아리만 들려줄 수밖에 없던 에코가 나르시스에게 하려던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냥 ‘(사랑)해요 해요 해요…….’ 뿐이었을까? 메아리만 들은 나르키소스가 에코의 마음을 알 리 없다

.

흰 눈이 소복이 내리던 어느 날 돌계단 아래 무언가가 파르라니 눈짓을 하고 있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나만큼 급했던지 벌써 나와 떨고 있다. 이파리 끝은 점점 누렇게 말라가고 내가 오가며 멋모르고 짓밟은 흔적도 역력하다. 서둘러 나오더니 상처투성이다. 안쓰럽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저러다 그냥 스러지겠지.

 

내 생각은 빗나가고 있었다. 한겨울 눈이불을 덮고 냉기를 견뎌낸 새싹은 날이 갈수록 생명의 푸른 피를 길어올리고 있었다. 이게 뭘까? 지난 초겨울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 와 어디서 무슨 싹이 나올지 나도 아직 모른다. 하여 이번 봄에 누가 제일 먼저 봄소식을 전할까 내심 기다리던 중인데 첫 번째 주자가 꼴이 영 아니다. 그래도 용케 살아난 것이 기특할 뿐이다. 그러고는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리고 그의 시난고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상처를 보듬고 있는 동안 나의 시선은 녹두 빛 매화 봉오리에 머물렀다. 아침 서리에 봄까치꽃이 화들짝 놀라고 양지바른 곳에서는 별꽃도 점점이 눈에 띈다. 오며 가며 내가 밟은 꽃씨들은 또 얼마나 절망했을까. 이것들에 사죄하듯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여 겨우 그들과 눈을 맞춘다.

 

밤사이 얼었던 대지에 햇살이 스미고 출산의 고통을 마친 생명체의 숨소리로 마당이 술렁인다. 돌계단 아래 그 녀석도 어느새 진초록 긴 잎사귀를 무더기로 올리기 시작했다. 내게 밟혔던 자국도 사라지고 새살이 돋는다. 낯이 익다.

, 너였구나, 수선화.

 

누렇게 뜬 이파리는 어느새 생기를 찾고 꽃대를 쭉쭉 올리더니 황소바람에도 건들건들 봉오리를 터뜨렸다. 춘분을 앞두고 매화나무도 이제 겨우 벙글었는데. 한 송이, 두 송이, 어느새 셀 수 없이 많은 꽃들이 노랑노랑 하며 머리채를 살랑댄다. 접시처럼 펼쳐진 다섯 장의 연노랑 꽃잎과 가운데 진노랑 잔 모양 꽃잎이 볕을 받아 투명하다. 날갯죽지를 뒤로 젖힌 채 작은 몸을 앞으로 쑥 빼고 어미를 찾아 달려가는 병아리 같다. 그 모습이 낫낫하면서도 당차 보인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누구보다 먼저 당당히 꽃을 피워냈으니 수줍어할 줄 모른다고 누가 탓하랴. 겸손하지 않다고 누가 나무라랴. 자신을 낮추기는커녕 처음 꽃대가 올라올 때보다 고개를 더 들었다. 이 당당함이란. 연못을 들여다보는 나르시스의 모습도 이랬을까? 나르시스가 스스로 반할 만도 하겠다. 내게도 그런 수선화 같은 친구가 있다.

 

낯을 가리지 않는 그는 첫 만남에서부터 누구에게든 적극적이다. 서먹함도 농으로 풀어가는 그녀 주변엔 늘 웃음이 그치질 않는다. 기독교인인 그녀는 우연히 찾은 절에서도 스님을 도와 법당 청소를 할 만큼 서글서글하다. 식당에서도 반찬이 모자라면 다들 쭈뼛쭈뼛하는 사이 선뜻 나서서 더 줄 것을 당당히 요구한다. 자신의 장점을 스스럼없이 얘기할 만큼 솔직하고 남이 일러주는 단점도 바로 수긍하며 받아들인다. 그런 시원시원한 모습을 사람들은 좋아하면서도 뒤에서는 잘난 척을 하느니 자기 자랑을 하느니 하면서 수군대곤 한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장사하느라 바쁜 어머니 밑에서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하며 자라야 했다. 마음 기댈 형제도 없이 외로웠다. 평생 봄이 오지 않을 것 같던 겨울 같은 세월을 당연한 듯 여기며 살아왔다. 그의 적극적인 성격은 아마도 들풀처럼 강인하게 살아온 힘든 역경 속에서 얻은 소산이지 싶다.

애면글면 살아온 지난날의 자신이 스스로 대견하다. 그녀에게 봄 같은 오늘은 덤이다. 행복은 불행을 겪고 나서야 찾아오듯이 그녀가 그랬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늘 즐겁고 당당하다.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은데 사람들의 시선은 늘 지금의 모습에만 머문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정욕구가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인정받지 못한다면 삶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크게든 작게든 누구에게라도 인정받을 때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에코는 나르시스를 사랑했지만, 나르시스 자신도 원하던 사랑을 얻지는 못했다. 님프들의 사랑을 외면했기에 그가 도도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인정욕구를 채워준 님프가 없었던 것은 아닐는지. 수선화는 홀로 엄동설한 언 땅에서 서둘러 촉을 끌어올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끝내 수선화가 꽃을 피워내면 그 아름다움에만 탄복할 뿐 아픈 과정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쩌면 나르시스는 지독히도 외로웠는지 모른다. 남이 알지 못하는 그만의 고통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더욱 당찬 모습으로 피어났을 것이다. 그는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아픔까지 사랑해줄 님프를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나르시스. 그의 화려한 모습 뒤에 감추어진 외로움이 봄바람에 일렁인다. 아무도 모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