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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수필

주인은 나만이 아니었어/수필미학 2022가을호

주인은 나만이 아니었어

 

강현자

 

소문은 사실이었다. 여태 한 번도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어 긴가민가했는데 오늘에야 드디어 실체를 확인했다. 대문 앞 텃밭에 물 주기를 막 끝내고 뒷정리를 하던 참이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둔탁한 소리에 몸이 불편하신 이웃집 아주머니의 전동차가 내려오나 보다 했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커다란 물체가 휙 하고 지나간다. 낯선 광경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바짝 따라붙어 고라니를 쫓는 백구. 둘은 필사적이었다. 제 몸집보다 큰 고라니를 쫓는 백구가 퍽이나 용감해 보인다. 가끔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나를 놀라게 했던 그 백구다. 사실 고라니든 백구든 모두 내게는 불청객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어느새 나는 백구를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우리 텃밭은 동네에서도 날망에 있어 동물들의 출입이 잦은 편이다. 고라니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짐승들의 텃밭 출입을 막아야겠기에, 이른 봄 그물 울타리를 쳤다. 내심 든든하게 여기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덩치가 제법 있는 백구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밭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도 나도 얼음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미 갖가지 모종을 심어놓은 터라 발로 빠댈까 노심초사 불안했다. 한겨울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꼬랑지를 바짝 쳐들고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었다. 나도 질세라 뚫어져라 쳐다보면 꼬리를 내리고 먼저 슬슬 피했던 그였다. 당황한 나는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서 있다가 소심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너 여길 돌아다니는 건 좋은데 밭으로만 들어가지 마라. 저기 울타리를 쳤으니까 밖으로만 다녀야 해.”

알아듣거나 말거나 아이 달래듯이 백구에게 던진 말이다. 내가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백구는 한참을 서서 내 얘기를 듣는 듯하더니 밭고랑 사이로 유유히 걸어가는 것이었다.

아니, 그쪽이 아니라고! 이쪽으로 가라니까?”

무슨 소용이랴. 백구는 알 듯 모를 듯 힐끔힐끔 나를 돌아보더니 제 갈 길을 간다. 그럼 그렇지.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

그랬던 백구였다. 동네에서는 들개라는 얘기도 있고 어떤 공장에서 키우는 개가 풀려서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있다. 어떤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번번이 맞닥뜨려야 하는 나로서는 그를 내쳐서 감정을 상하게 하기보다 그냥 한 동네 같이 사는 이웃이라 여기기로 했다. 해서 음식물 찌꺼기가 나오면 한 곳에 모아 그들에게 공양을 한다. 이거라도 먹고 배를 채워야 내 영역을 넘보지 않을 테니 말이다. 고양이도 먹고 들개도 먹고 고라니도 먹으리라. 그런대로 먹을 만한 음식물을 버릴 때는 내가 마치 은총이라도 베푸는 듯 알량한 선심을 쓰는 것이다.

가끔은 고양이도 우리 집을 찾아온다. 마치 제집 드나들 듯 버젓이 계단을 밟고 올라와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마당 수돗가에서 내가 빨래를 하는 중에도 태연하게 내 옆을 지날 때가 있다. 당황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이니 도무지 누가 주인인지 어이가 없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뒤꽁무니에 대고 사정하듯 말한다. “내 눈에만 안 보이게 다녀라.”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녀석은 파라솔 의자 밑 그늘에 떡하니 앉아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작은 텃밭 하나에 주인이 여럿이다. 고라니를 막아내는 백구는 일등주인이다. 두더지를 지키는 건 서비스다. 까치도 참새도 수시로 들락거리며 주인 행세를 한다. 그러니 씨앗을 심을 때도 꼭 세 알씩 심는다. 하나는 새가 먹고, 하나는 벌레가 먹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먹는다. 행여 그들이 양보라도 할라치면 내 몫이 늘어나는 횡재를 하는 것이다. 자두나무에 자두는 고스란히 벌레에게 헌납했으니 벌레도 주인이다.

평소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로서는 이곳 전원생활이 만만치는 않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여전히 깜짝깜짝 놀란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의 존재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인간이 무시를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자신들이 원래 주인인 양 내가 있거나 말거나 유유자적이다. 나 혼자 공연히 그들을 경계하고 무섭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이 지나고 철이 바뀌면서 이제 그들과 차츰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쓰레기를 버리려 동네 어귀로 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 백구가 겅중거리며 내게 달려들 듯 숨을 헐떡이는 것이 아닌가. 내게 달려들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 애써 외면하는데 백구는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끝까지 따라온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니 선한 눈매에 꼬리까지 흔든다. 아하, 나를 알아보겠다는 뜻이구나.

맞다. 백구든 고양이든 애당초 내게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얕보지도 않았다. 내게 해코지 한 적도 없고 밭을 빠대고 다닌 적도 없다. 그냥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눈치 없는 벌레도 자신의 생명을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공연히 두려워하고 경계한 건 내 쪽이었다.

고라니와 백구가 사라진 쪽을 바라본다. 이제 고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나의 텃밭을 저토록 필사적으로 지켜주는 백구가 있으니 말이다. 말해 무엇하랴. 이 곳 주인은 나만이 아니었던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