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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수필

화(和)로 끓어나는 수제비 / 2022 한국수필 10월호

 

촤르르 쏴아.

처마 밑으로 파고드는 소나기가 옹송그레 일어선 솜털 사이로 끈적한 열기를 가셔낸다. 비가 오는 날이면 은근히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양재기를 꺼냈다. 냄비에 멸치를 넣고 감자를 어슷하게 썰어 국물을 낸다. 봄 가뭄에 유난히 힘들어했던 감자다.

 

밭두둑이 딱딱하게 굳고 잡풀마저 생장점이 머뭇머뭇했다. 감자꽃이 피고 한참 몸피를 부풀려야 할 때 한 달 이상을 비가 내리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호스를 끌어다 한두 시간씩 물을 댔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한줄기 비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저러 겨우 캐낸 감자니 어찌 애틋하지 않으랴. 펄펄 끓는 물 속에 들어서야 겨우 긴장이 풀리는가 푸슬푸슬 제 몸을 부스러뜨린다. 이 순간을 위해 봄부터 그렇게 긴 가뭄을 견뎌왔던가. 제 한 몸 찌고 말려서 뒤틀려가며 살신(殺身)하여 인()을 이룬 멸치가 그를 품에 안는다.

 

양재기에 통밀가루를 넣고 적당량의 물을 부은 다음 이리저리 치댄다.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시던 수제비는 반죽을 질게 해서 주걱으로 떠낸 다음 젓가락으로 뚝 뚝 삐졌다. 주걱에서 떼어낸 수제비떡은 물고기가 물속으로 뛰어내리듯 펄펄 끓는 국물로 퐁당퐁당 들어갔다. 오늘은 그보다 되직하게, 칼국수보다는 부드럽게 치댄 반죽을 검지와 장지 사이로 얇게 벌려 뚝뚝 떼어 넣는다. 거무스름한 통밀 반죽은 영락없는 농군의 얼굴빛이요, 쫀득쫀득한 식감은 차진 인정이다.

크기도 제각각, 두께도 제각각, 떼어낼 때마다 모양도 제각각이니 틀에 박히지 않은 여유라고나 할까? 규범을 벗어난 자연, 무위(無爲)의 경지다. 이들도 제멋대로 천방지축이던 아이가 커서는 오히려 더 큰 일을 하지 않던가. 하는 것이 없는 듯하나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無爲而無不爲.

 

괄괄한 땡볕을 한몸에 받은 호박잎새 아래 가만히 숨어 있던 호박이 이제 막 이소(離巢)를 준비 중이다. 감자가 익어가고 수제비가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하면 방금 따온 애호박을 쏘각쏘각 반달 모양으로 썬다. 살이 연한 애호박이 칼날이 지난 자리에 송글송글 땀방울을 맺는다. 출발선에 선 육상선수처럼 저도 긴장이 되나 보다. 하지만 뜨거운 육수에 들어가면 이내 안정을 찾고 유들유들 노랑과 연둣빛으로 생기를 돋운다. 그 빛깔은 끝까지 잃지 않는다. 감자와 반죽과 한데 어우러지지만 저를 버리고 따라가지는 않는다. 和而不同이다.

 

세상에 양파만큼 솔직한 것이 또 있을까? 애초부터 의뭉스럽지 않았다. 밭에서도 몸피가 불어나면서부터 땅 위로 온전하게 몸을 드러낸다. 제 가진 것을 다 보여주고 나면 고단한 생을 마감하려 꼿꼿하게 서 있던 잎을 스스로 누인다. 땅속에 몸을 숨긴 마늘이나 감자처럼 얼마큼 컸을까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껍질을 까고 또 까도 새로운 것이 나올 게 없다.

 

양파 같은 사람이 있었다. 스펙(Specification)이 화려하여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우리네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낮추어 드러내지 않는 것을 겸손이라 하지만 양파처럼 오롯이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겸손이지 않을까? 솔직하면 남을 기만할 일이 없으니 겸손에는 솔직함이 우선이다.

 

불을 낮춘다. 냄비 속에서 저들끼리 소용돌이치며 끓는 것은 소란이 아니라 화합이다. 시원하고 구수한 맛을 위한 춤사위다. 다진 마늘과 송송 썬 대파마저 매운맛을 버리고 다른 것들과 호흡을 맞춘다. 겸양지덕이다. 계란은 안 넣어도 그만이지만 그렇다고 안 넣으면 왠지 서운하다. 있는 듯 없는 듯 별 존재감이 없던 사람도 막상 자리에 없고 보면 아쉽지 않던가. 세상에 존재의 가치가 없는 사람은 없다.

 

이제 다 되었다.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빗소리도 잠재운다. 사실 수제비 맛이라야 특별한 향이 있는 것도 아니요, 자극적이지도 않다. 별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니지만 저마다 자신의 맛을 드러내지 않는다. 잘났으나 못났으나 저 잘난 맛에 사는 우리네와는 다르다.

 

별나지도 귀하지도 않은 소박한 맛에 끌리는 이유가 뭘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멸치, 감자, 양파, 호박. 오성급 호텔에서 고샅길 접어든 할머니 집까지 어딜 가나 흔하디흔한 식재료다. 독특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름 아린 맛, 매운맛, 저만의 맛을 갖고 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을 넘어 에 이른 맛이다.

 

호화스럽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나 친근한 서민의 맛. 어울렁더울렁 제 모습 뭉개가며 자신을 낮추니 귀한 음식 아니어도 귀히 여길 수밖에.

 

박수갈채처럼 요란하던 소나기의 흥분도 이제 잠잠해졌나 보다. 옆집에서 건너오는 발걸음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