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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수필

유리벽과 나팔꽃

유리벽과 나팔꽃

강현자

 

나팔꽃이 피었다. 반갑다. 필까 말까 망설이다 피었는지 알 수 없지만, 주인의 무관심에도 꿋꿋하게 피어난 나팔꽃이 대견하다. 꽃이 어른 주먹만 하게 크니 보기만 해도 입이 절로 벌어진다. 몇 해 전 지인에게서 씨를 얻었는데 워낙 꽃이 크고 색이 고와 해마다 씨를 받아 화분에 심었다. 그러던 것이 작년에는 씨앗 둔 곳을 몰라 심지 못했었다. 올봄 우연히 씨앗 봉지를 찾아낸 것이다.

 

한 해를 묵은 씨라서 심을 때만 해도 과연 싹이 날까 의심스러웠다. 반신반의하며 며칠을 지켜보니 봄볕은 나팔꽃 화분에도 공평하게 은총을 베풀었다. 용케도 싹을 틔워 줄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밑동부터 맺혀야 할 꽃봉오리가 맺히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실망한 나는 연둣빛 이파리에나 만족하자 했다. 상큼한 잎사귀만으로도 생기가 넘치니 네모진 아파트 안에서 느끼는 동그란 위안이었다.

 

나팔꽃 덩굴은 끝간 데를 모르듯 위로 위로 올라가더니 급기야는 버티컬까지 감기 시작했다. 한낮의 태양은 점점 달구어지고 볕을 가려야 하는 버티컬은 제 역할을 놓은 채 나팔꽃 덩굴의 지지대가 되어버렸다. 허락도 없이 거침없이 감고 올라서는 덩굴손이 두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여름이 익어가도록 이파리만 무성해진 나팔꽃에 나의 관심은 점점 무뎌갔다. 늦잠에 겨운 아침마다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가끔 잎이 시들해지는 것 같으면 물을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붉은보랏빛 꽃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대고 무어라 소리를 지르듯 벌게진 얼굴로 밖을 향해 피어난 것이다. 반갑던 마음도 잠시, 왠지 모를 두려움이 서려온다.

 

유리창에 바싹 기대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핀 나팔꽃이 그동안 나의 게으름을 세상 밖에 대고 소문이라도 낼 것 같다. 안에서 하는 이야기를 모조리 동네방네 방송을 해댈 것 같다. 흉잡힐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소심해진 나는 유심히 꽃을 살펴보다 유리창이라는 벽에 절감한 나팔꽃을 발견했다. 그들은 거의 나를 등지고 밖을 향해 피었다. 개중에는 맘껏 활개를 펴지 못하고 단단한 유리창에 부딪쳐 살가운 꽃잎이 일그러진 것도 있다. 세상 밖에 대고 힘껏 외쳐야 할 녀석들이 아닌가.

 

유리창이 떡하니 버티고 섰다. ‘내가 너의 바람막이가 되어 줄 테니 아무 걱정 말아라. 내 마음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단다. 네가 원하는 하늘도 바라볼 수 있게 해 줄 것이고 햇볕도 온전하게 전해줄 것이다. 난 이렇게 늘 투명하잖니? 그러니 나를 믿어라라며 웃음을 보인다. 그러면서 못 본 건지 못 본 체하는 건지 일그러진 나팔꽃의 얼굴은 상관하지 않는다. 나팔꽃이 측은하다. 유리창에 대고 아무리 나팔을 불어댄들 누구 하나 알아듣기나 할 것인가. 묵은 씨로 겨우겨우 싹을 틔워 예까지 온 자신을 스스로 대견해 한들 누가 알아주기나 할 것인가 말이다. 소리 없는 나팔일 뿐이다.

 

우리는 유리벽 같은 사람을 만날 때 숨이 막힌다. 그는 물론 능력도 있고 경험도 있고 가진 것도 많다. 부모가 그렇고 상사, 선배가 그렇다. 그들은 무모한 도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완전무결하기를 바란다. 자신이 살면서 얻은 경험치가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이나 후배가 하는 일은 늘 못 미덥다. 그러니 견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겠다며 보호자를 자처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나팔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활짝 펴 보일 수가 없다. 태양을 향해 피어야 하거늘 번번이 유리벽에 가로막혀 얼굴이 일그러진다. 고마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망스럽다. 자식은 부모의 간섭이 싫고 후배는 선배의 잔소리가 성가시다. 기를 쓰고 부딪힐 때마다 마음엔 상처가 쌓인다. 앞에 가로막힌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으니 옆으로 옆으로 자꾸 다른 곳으로 손을 뻗는다. 유리벽을 피해 좀 더 먼 곳에서 제대로 된 꽃을 피우려 한다.

 

유리벽은 답을 훤히 알고 있는 자신을 순순히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뻗어가려는 나팔꽃이 불안하고, 나팔꽃은 요지부동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하는 유리벽이 답답하다. 유리벽은 자신이 투명하다고 주장하지만 선팅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세월의 먼지가 덕지덕지 묻었어도 자신의 먼지는 보지 못한다. 나팔꽃은 그런 유리벽이 답답하다. 뚫고 나가고 싶다. 아우성을 치면 칠수록 나팔꽃잎은 일그러진다. 불통은 원망을 낳는다. 소통은 쌍방향이지 결코 일방이 아니다. 대화 좀 하자고 불러놓고 저 혼자 훈계하면 꼰대라는 것을 꼰대 자신만 모른다.

 

아이는 요지부동한 부모가 답답하고 부모는 뻔한 답이 있는데도 멀리 돌아가려는 아이가 답답하다. 아이는 부모가 되어보지 못했지만 부모는 아이였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 옛날 노자도 한정된 지식이나 체계에 가두려 하지 말고 무지무욕(無知無欲) 하여 열린 광장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했다. 나팔꽃 덩굴이 세상 밖으로 뻗어갈 수 있도록 이제 유리창을 활짝 열어야겠다. 여태껏 나도 유리벽으로 살아오진 않았을까?

 

아들에게서 걸려온 전화벨 소리에 괜스레 뜨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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