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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의 창작 수필

함박꽃

함박꽃

 

 

함박꽃은 순자. 서양에 장미가 있다면 동양에는 함박꽃이 있다고 할 만큼 화려한 꽃이라지만 볼 때마다 그 흔한 순자라는 이름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순하고 마음 넉넉한 이웃집 순자, 어디서나 만나면 방싯방싯 웃으며 다가올 것 같은 여자, 그러면서 늘 자신을 낮추는 속 깊은 여자 말이다. 호수공원에 함박꽃이 지천이다. 수채화인 듯 겹쳐진 꽃잎의 농담이 선연하다. 속살거리는 햇살에도 채 못다 핀 꽃잎 하나. 부끄러워 얼굴을 반쯤 가린 영락없는 순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꽃말이 수줍음인가 보다. 큼지막한 함박에 노른자를 체에 거른 듯 샛노란 꽃술이 포슬포슬하다. 차반에 집적대는 꿀벌들의 흥타령이 왁자하다.

 

수틀이 자리를 거지반 차지한 어머니의 방엔 화려한 색깔을 고루 갖춘 8자 모양의 작은 비단실이 나란하게 있었다. 반짝반짝 빛깔 고운 색실이 탐이 나 만지작거리기라도 하면 아서라며 호통을 치곤 하셨다. 같은 계열로 그라데이션을 이룬 색실에서는 디크레센도 연주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바늘이 꽂히는 정확한 자리매김과 실을 당기는 정도의 균일함에 따라 결의 곱기가 결정되었다. 실을 잡아당길 때마다 오므린 듯 편 듯 어머니의 약지와 소지는 마치 나비춤을 추는 여승의 장삼처럼 고고해 보였다.

커다란 수틀을 상 위에 걸쳐 놓고 오른손으로 바늘을 누르면 아래서 왼손이 잡아, 주거니 받거니 공단에 새겨진 도안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비단 천에는 바위가 들어서고 가시 돋은 장미가 농염한 모습으로 봉오리를 열었다. 꽃술이 들어앉고 벌과 나비가 날았다. 어머니의 손끝이 스치면 공작새도 날개를 펴고 노송 위에 학이 날아와 앉기도 했다. 그중에 으뜸은 역시 소담한 함박꽃이었다. 분홍, 하양, 붉은 함박꽃들은 짙은 청색 공단과 대비를 이루어 더욱 화사했다. 반쯤 벌어진 꽃잎 위에 빛이 스며든 색감까지 어머니는 완벽하게 수를 놓으셨다. 벌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을 거라는 선덕여왕의 모란은 분명 아니었다. 어머니의 함박꽃에는 향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것은 외롭고 고달픈 향기이기도 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읜 부잣집 막내딸이었던 어머니는 외삼촌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열여덟 철부지 소녀가 한국전쟁 참전 장교이던 아버지를 만나 사랑에 빠지셨단다. 시집이라고 와보니 맏며느리에게 주어진 무거운 보퉁이가 어깨를 짓눌렀고 살림이라야 허구한 날 쌀독에 바가지 긁는 소리였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의 박봉으로는 오남매 건사하기도 빠듯했다. 집안일보다 바깥일에만 신경을 쓰느라 살림 길속은 아예 없는 아버지셨다. 생활에 보탬이 된다면 뭐라도 해야 했지만 공무원 체면에 부업 하는 일을 마뜩잖아하시는 아버지와 자주 부딪쳤다. 요즘이야 맞벌이가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아내가 일하는 것은 남편이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애면글면 어머니의 보짱은 남편의 벽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게다가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아버지 주위의 여자들.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자상하고 다정하신 분이었지만 살림밖에 모르는 어머니의 촉은 아내로서의 자리를 무참하게 흔들어 놓았다.

수틀 앞에만 앉아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싫어 나는 여간해서 그 방을 드나들지 않았다. 퇴근하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볼멘소리가 높아지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묵묵부답 조그맣고 가느다란 손이 수틀 위에서 바삐 움직였다. 어머니의 머릿속엔 늘 아버지가 모르는 검은 숫자의 세계가 난무했을 것이었다. 낯모르는 어떤 여인의 농염한 미소가 가슴을 할퀴었을 것이었다.

청소하다가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골무를 주운 적이 있다. 바늘을 막아내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골무가 구멍이 난 채 내 손에서 흘러내렸다. 실이 자꾸 손끝에 걸려서 보푸라기가 생긴다며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손에 로션을 열심히 바르시던 이유를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터지고 갈라진 손가락을 움켜쥐고 뒤돌아 앉아 호호 부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손 한번 잡아드리기는커녕 못 본 체 외면한 매정한 딸이었다. 찔리고 찔려서 온통 해져버린 골무가 당신의 모습이었던 것을.

남편에 대한 바람이 컸던 탓일까. 원망과 한을 오롯이 혼자서 견디며 지내온 세월은 사랑이었다. 설움을 오색실에 꿰어 꽃을 피우고 나비를 부르고 새를 날리며 타는 속내를 달래셨다. 비단실에 원망을 꿴 바늘은 어머니의 가슴에 한땀 한땀 꽂혔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애타는 그리움을 아등바등 미운 정으로 엮어갔다. 함박 만하게 웃는 함박꽃은 마른 눈물로 피워 낸 어머니의 타는 가슴이었다. 남편은 언젠가 내 편이 되어 돌아올 거라 말없이 기다리며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외로운 사랑이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던 순자의 사랑법이 그랬다. 이 땅의 순자는 다 그랬다. 순자는 우리네 모든 어머니의 이름이다. 나를 위한 이기적인 생각으로 사랑의 끈을 잘라버리는 요즘의 사랑법과는 달랐다.

왕자는 이웃나라 공주를 그리다 모란이 되고, 공주는 왕자를 못 잊어 찾아갔다가 모란 옆에서 함박꽃이 되었다는 전설처럼, 사랑은 기다림이고 기다림은 그리움을 부른다. 어쩌면 내내 그리워하다 어긋나버리는 게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한 여인의 외로움도 설움도 그것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겨진 엄마 걱정에 쉬이 눈을 감지 못하셨건만, 이미 병석에 누우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세월의 강은 이미 다 흐르고 난 뒤였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던 딸이 이제는 어머니의 삶 앞에서 고개가 숙어진다. 상처투성이인 영광이지만 가정을 꿋꿋하게 지켜낸 당신은 위대했노라고.

 

한 쌍의 젊은 연인이 함박꽃 앞에서 또 하나의 사랑을 엮는다. 사랑의 결실은 결혼이 아니라 그 너머의 그리움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걸 그들은 알까. 알록달록 수를 놓은 너른 함박꽃 위로 어머니의 하얀 손가락이 보인다. 그리움을 달래던 순자의 슬픈 미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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