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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42. 육군대학교 교육

1955, 여름 휴전 이후 2년이 지난 이 무렵 나에게 치명적인 불행이 닥쳐올 줄이야!

후방에 전후방 교류로 내려와 이제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왔다고 내심 좋와했는데…….

전방에 있을 때 이미 건강에 이상이 온 것을 약간 느끼고 있었으나 설마 큰 문제가 있으랴 했다. 그런데 피로를 느끼고 졸음이 오고 소화가 안 되고 춥고 열이 나고…….

의료 시설도 별로 없고 자각 증상만으로 건강을 체크 할 정도의 분위기였었기에 후방에 올 때 신체검사를 받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정부의 방침과 군대의 전후 의료 시설의 확충으로 장교들에 대한 종합 검사가 실시되었다.

 

당시 서대전에 있던 63 육군 병원에서 X-Ray를 찍어보니 가 손상되고 오른쪽 어깨 밑 상엽과 좌측 중엽 두 곳에 뚜렷한 상처가 발견되었다. 병명은 폐결핵 중도라는 것이다. 이 결과가 나오자 나는 큰 실망을 느꼈다. 당시만 해도 폐결핵은 이미 죽은 사람과 같이 인정받을 때였기 때문에 이만저만의 쇼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그만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 원인이 무엇이었나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그날 의지만으로 자기의 건강을 과신하고 오로지 군대 안에서 나날이 일어나는 일과에 충실하고 몸을 혹사하다시피 유지하다 보니 이 꼴이 될 수밖에. 신장 178cm, 체중이 58kg이었다. 내가 20세부터 21세 때는 무게 80kg의 당당함이 있었는데 이제 내일을 알 수 없는 병신이 되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과로하고 좋지 않은 술 마시고 때로 혈기를 낭비하니 병에 걸릴 수밖에.

 

그러나 대전에서의 생활은 병 때문에 중단할 수 없었다. 즉 입원하기에는 너무나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6.25 사변에 헌신한 보상은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도 없고 저축도 없었다. 다만 그날그날 아이들의 성장과 생활의 안정만 겨우 지켜오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실망은 차차 절망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나의 마음은 안정을 잃고 나쁜 줄 알지만 술과 향락으로 자포자기의 생활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가족을 돌볼 이성마저 잃어 무의미한 나날이 계속되고 오로지 조금이라도 더 근무하는 척 입원만 연기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니 몸은 과로로 더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입원을 하지 않고 꾹 참고 매일같이 부대에 나갔다. 그러던 중 나에게 전속 명령이 떨어졌다. 육군 대학의 원자무기반 교육 이수자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마치 휴양 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학교는 진해에 있었고 약 한 달 동안 교육에만 전념했다. 원자무기의 원리부터 무기 사용의 개념까지. 군대 생활을 통하여 교육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었다. 일반 교육과는 달리 군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과목이라 흥미도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원자학이란 일반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과목이었다. 다만 제2차 대전 시 일본 패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의 원자탄 투하로 알려진 신무기였던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위력과 이론에 새삼스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니 이미 나에게 전속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건조장으로 알려진 2군 사령부 공병참모부 근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사기는 극도로 떨어졌고 또 근무도 불편했다. 집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처음에는 대전의 집에서 대구까지 기차 타고 출근했으나 그것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과였다. 결국 사령부의 숙소에 기숙하며 일하게 되니 일에 충실할 수 없고 또 나의 건강도 은연중 걱정이 되었다. 가정의 살림도 유지할 수 없었다. 저축한 돈도 없었고 약간의 여유자금도 점차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로 1년을 넘겼다.

그러나 집 걱정은 없었다. 대전에서 근무할 때 삼성동에 한 25평 정도의 단독 주택을 신축하고 살았기 때문에 가족은 나의 이동과는 상관없이 계속 살림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