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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39. 전후방 교류로 후방에 그리고 또 전방에

전후방 교류로 후방에 그리고 또 전방에

 

휴전이 되니 장교들의 전후방 교류 인사가 실시됐다. 士氣振作의 일환으로 장기간 전방에 근무한 장교의 인사로 나는 그것에 해당되어 후방으로 오게 되었다. 대전에 있는 공병대의 본부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오랫동안 전방에서만 근무한 나로서는 모든 생활이 익숙하지 못했으나 후방에 왔으니 뭔가 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나의 신변정리를 시작했다.

 

즉시 고향에서 아내를 데리고 와 부대 근처에 새살림을 시작했다. 아내는 그렇게 좋와할 수 없었다. 결혼 즉시 고향에서 부모님과 시동생의 뒷바라지며 식량난으로 죽으로 연명하다시피 하다가 이곳에 와 남편과 같이 있게 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방 한 칸짜리 농가였고 살림살이도 급조식으로 장만했다. 그럭저럭 신혼생활을 하는 데는 불편없이 달콤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 부대는 주로 후방 시설의 반영구시설 복구가 주 임무였는데 전방부대의 분위기와는 딴판으로 무사안일주의와 개인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있어 나는 크게 실망을 했다. 그러나 적응되면 하고 근무를 하는데 또 나에게 전속 명령이 떨어졌다. 3개월 만에! 아내는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새 부임지는 양구에 있는 1102 야전 공병단으로 전방에 속한다. 따라서 또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불만을 했다. 전후방 교류로 후방에 온 지 얼마 안 되는데 이것은 무슨 변고냐!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군인은 명령에 살고 죽는 것인데. 뒤에 알고 보니 이 부대는 3군단 직속이기 때문에 전방 중에서도 후방에 속한다고 하기에 약간 안심을 했다.

 

부대 도착신고를 하니 공병단의 독립 중대인 506 철교 중대장이였다. 모두들 누구의 빽이냐고 한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란다. 부대로 부임해 보니 과연 나를 놀라게 했다. 철교 가설이 주 임무인 이 부대의 장비도 대단했다. 짚차가 3, GMC, 닛산, 도요다 등 추럭이 30대가 넘고, 콤푸렛샤, 6톤 차, 샵추럭 등 모두 50대에 가까운, 중대치고는 큰 부대였다.

 

그러나 나의 가장 큰 걱정꺼리는 아내의 문제로서 고향에 다시 보내자니 불쌍하고 어떻게 할까 걱정을 했는데 중대 부관이 걱정말라 하지 않는가. 이 공병단의 장교 중에는 춘천에서 살림을 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즉시 방을 얻도록 지시를 하니 춘천 셈밭이라는 부락에 방을 얻어주었다. 그때까지 대구에 머물며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즉시 데리고 와 또 살림을 꾸몄다. 그러나 매일 출퇴근하는 입장은 아니였다.

 

부대근무는 나의 적성에 맞고 중대장에 대한 대우도 좋와 나는 이 부대에서 소신껏 일할 수 있었고 가끔 춘천에 나가 젊은 날의 행복도 누릴 수 있었다. 이 부대에서 약 2년 반 있을 동안 약간의 저축을 하게 되니 아예 집을 서울로 이사해 장차 서울에 집 한 채라도 구해보자는 생각에 서울로 이사시켰다. (결국 생각대로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왔다갔다 이사만 하게 되니 젊은 아내의 고생은 말이 아니였을 것이다. 어쩌다 후방에 출장 갈 때나 집에 들르게 되니…….

 

그러는 동안 나는 고참 대위가 되어 자연 후배에게 그 부대를 물려주고 113대대 부대대장으로 부임했다. 역시 1102 야전 공병단 소속인데 원통리에 있었다. 인제 바로 북쪽에 있는 조그만한 부락이였는데 이곳에는 많은 민간인이 살고 있었고 군인들의 출입도 빈번하였다.

부대의 임무는 인제로부터 속초 간의 도로작업, 도량의 가설, 작전도로의 신설이였다. 거의 매일같이 그 구간에서 작업을 했다.

 

휴전이 된 후 뚜렷한 작전 징후도 없고 부대의 이동도 별 없는 것 같고 민간인도 속속 북쪽 북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니 우리의 생활권도 원통리와 인제가 되었다. 나는 아내를 서울에서 이곳으로 다시 이사시켰다. 원래 이삿짐도 많지 않어 이사는 간단했다. 그리고 이 부대에서는 서울까지 나가기가 어렵기도 했다. 바로 부대 옆의 원통리에 자리를 잡으니 매일같이 집에 들를 수 있었고 아내도 좋와했다. 그리고 부락 인심도 좋왔다.

한동안 이곳에 있었으나 부대가 약간 북으로 이동하게 되어 (지금의 백담사 입구) 또 이사를 했다. 이곳은 민가가 없어 부대대장 관사로 집을 한 채 (2) 지어 한 1년 반 있었다.

 

이곳은 부대의 임무 수행에 편리한 위치였으나 워낙 산간지인지라 겨울에는 영하 20도 이상 내려 추위가 대단했고 눈도 많이 온다. 이 무렵 나는 고향에 있는 희준 동생을 데리고 왔다. 이곳 산에 꿩이 많이 있으니 싸이나 약으로 심심풀이나 하라고. 겨울에는 고향에도 별 할 일 없으니 당분간 이곳에서 쉬라고 했다.

부대대장이니 그런 일은 마음대로 할수 있었다. 과연 하루는 아침 일찍 약을 뿌린 밭에 나가더니 살이 찐 장끼와 안끼를 여러 마리 잡어와 한때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이 지금껏 추억에 남는다.

 

또 이곳은 속초에서 잡은 명태를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매일 밤에 우리 부대 초소 앞을 지나간다. 그때는 명태를 초소 앞에 던지고 간다. 수고한다는 인사와 함께. 그것은 충분한 부대 부식이 되기도 하고 아내는 그 덕으로 맛있는 찌개를 만들기도 했다. 한때 눈이 많이 왔을 때 부대원들이 산양을 수없이 잡어와 먹기도 하고 말리기도 하고. 아내는 고독했지만 부대 당번이 하나부터 열까지 심부름을 해주었기 때문에 살림하는 데에는 큰 불편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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