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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40. 수색에서 첫 아이 낳고

수색에서 첫 아이 낳고

 

매일매일 계속되는 작업은 한결같이 같았다. 나는 때로 순찰 차 부대에 들른 공병단장과 진부령을 넘어 간성에 가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곤드래 만드래 될 때까지 놀기도 했다.

단장은 호기있고 군인다운 타입이었으므로 어느 집에서나 대환영이었고 나 역시 술에는 자신이 있고 해서 의기가 투합되니 이런 자리가 여러 번 있었다. 간성부터 속초까지 갈 때도 있었다. 젊은 날에 참으로 좋은 시기였는데.

 

호사다마라 할까. 이때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있었으나 큰 관심을 안 갖고 수개월을 그냥 보냈는데 그 증상이 앉기만 하면 졸음이 오고 식은땀이 나고 소화도 잘 안 되었다. 이런 증상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건강을 믿었다. 그러던 중 나는 서울 북방에 있는 수색으로 파견 나가기로 명령을 받었다. 30 예비사단의 부대 시설(건물)을 짓기 위해서 대대 선발대로 가는 것이다. 이곳에서 상당기간 머물게 된다는 말을 듣고 아내도 같이 수색에 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그때 아내는 임신 중이였다. 그리고 몇 달 후에 첫 아이를 낳았다. 1955년 음력 71일생 규숙이다.

 

이곳 수색에서 얼마 있어 나는 다시 전속 명령을 받어 대전의 1202 건설공병단 211대대 부대대장으로 부임을 했다. 아내도 좋와했다. 그곳은 고향도 가깝고 후방부대이고 모두들 요직이라 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였다.

부대는 대전 시내에 있었고 주로 부대시설을 건설하는 임무를 갖이고 있었다. 교육 총본부 (지금의 통신학교), 병참기지창(지금은 없어) 등등 대규모 공사를 하고 있어 전방부대와는 딴판이라 많은 기대를 걸기도 했다. 부대원들의 표정도 밝았다.

살림을 위해 삼성동에 방 3칸짜리 독채를 얻었다. 전세 15만 원인데 뜻밖에도 부대에서 부담해주었다. 나는 부관에게 물어보았다. 부관은 염려 마세요. 언젠가 또 전속하시게 되면 그 돈을 송별금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라고 하지 않는가. 과연 후방 부대는 모든 것이 넉넉한 모양이였다. 고향도 가깝고 집안 친척도 찾고 나는 이제야 잘 돼 나가는 모양이라고 내심 만족을 했다.

 

이때 비로소 나는 금전에 대한 애착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일 뿐 현실은 군인이 아닌가. 또 그 봉급으로 무슨 수를 내겠는가. 그러나 후방에 온 이상 돈은 필요하다. 몇 번이나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전방에 있을 때 돈에 대해서는 추호도 애착이 없던 나도 후방의 분위기 속에 살다 보니 자연히 그런 분위기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의식적인 부정은 싫어한 나였다. 머리만 잘 쓰고 또 전후 문란해진 사회 속에서 요령만 잘 부린다면 모두들 돈은 번다고 했다. 전쟁 때문에 전후방이 모두 이런 분위기에 젖어 갔지만 나의 개성은 그렇게 영리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다만 그런 속에서 인간의 속성대로만 살아나갔다.

 

때는 자유당 시절이었고 전후 복구작업이 한창때인지라 대전 시내는 활기차 있고 나도 장차 이곳에 자리 잡아 기반을 쌓을 생각을 했다. 고향에서 부모님이 자주 찾아와, 한때는 고생을 했으나 이제부터는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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