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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41. 대전 생활, 은숙이 낳고

대전 생활, 은숙이 낳고

 

대전에서의 생활은 바빴다. 복구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고 건설 공병인 우리 부대는 대전 시내에 있는 대규모 부대의 시설물 건설이 주 임무였다. 공사마다 모두 시일이 급박하여 낮에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퇴근 시간이란 없는 군대 생활이다. 물론 장교였기 때문에 영외 거주를 할 수 있는 처지인지라 밤에는 집에서 쉬는 자유시간은 많았다.

 

그러나 아직 집은 없는 실정이라 이곳에 와서도 전세 신세는 면치 못하였다. 삼성동에 살던 집에서 선화동으로 이사를 하고 당분간 그곳에서 살으니 이곳에서 둘째를 낳았다. 건강한 여자아이였다. 이름을 은숙이라 지었다. 1957214일생이다. 이제 아이가 둘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생활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었으나 워낙 밑천이 없고 붕급만 갖이고 사는 입장에서 나는 고향의 일까지 신경을 써야 하고 도시 생활의 생활비는 상상외로 많이 들어갔다. 저축이란 엄두도 못 내고 당시의 금융 사정은 불안한 상황이였다. 인프레 때문에 저축을 해봤자 본전마저 손해 보는 시대였다. 자연히 조금 있는 돈도 현금으로 갖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런 돈은 항상 쓰게 마련인지라 고향의 생활비 보조, 우리의 자녀와의 생활비 또 나의 용돈 등 그래서 가정에서의 저축은 기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용돈은 충분했다. 그것은 부대의 성격상 민간업자들의 군 하청 문제 등으로 교제상 제공되는 이른바 교제비 때문이였다. 그러니 그들과 그리고 관계자와의 모임 때 서로 주고, 받고, 먹고, 마시는 등의 경비로 모두 소화되었다. 최전방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환경이였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 나의 생활은 풍족하게 여유 있게 이어져갔다. 물론 고향의 생활도 나날이 좋와져 일상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나의 목표인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은 요원하기만 했다.

나의 지론은 기본 자산의 확보였다. 그것은 고향의 부모 형제를 위한 농토의 구입과 나의 가정을 위한 가옥의 신축 또는 구입이 그것이였는데 먹을 것 다 먹고 남들이 하는 것 다하고 보니 그것은 과연 어렵기만 했다.

 

휴전이 된 후의 대전 지방의 분위기는 매우 활발하게 보였다. 전후의 정돈과 아울러 복구 작업등이 한창이고 주민들은 나날의 생활에 바빴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활동의 소지가 한없이 많은 것 같았다. 기발한 직업들이 생기고 모두가 생활하는데 혈안이었다. 반면 전후의 사회는 실업자도 많아지고 전쟁고아들이 도처에서 방황했다. 비리와 불법이 자행되고 사회의 혼돈 속에 유흥업소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주로 서울에서 피난 온 주민과 북에서 피난 와 임시 거처를 잡은 사람과 아주 영주를 원해 이곳에서 머무는 사람들이 수없이 모여들어 시내는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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