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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45. 5.16 군사혁명 (1961.5.16.)

5.16 군사혁명 (1961.5.16.)

 

이승만 대통령이 영도하는 자유당은 날이 갈수록 부패하기 시작했고 각 분야에서 국민의 불만은 커가기만 했다. 선거도 부정선거였고 이승만 대통령도 종신 대통령으로 자처하고 장기 집권을 꾀했다. 그러나 신익희 후보의 사망으로 더욱 심해진 민심 혼란은 급기야 4.19 학생 데모로 파급되고 이승만은 망명하는 운명이 되었다. 장면이 이어받은 정부도 별수 없었고 결국 박정희가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았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각 관공서는 군인들이 참여하게 되고 군인의 위세는 대단했었다. 나도 그때쯤 제대했으면 뭔가 한자리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소령이면 시장 또는 군수뿐만 아니라 그 밖의 요직에 참여할 수 있었던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세월은 흘러 62년이 되면서 병원에 장기 입원자에 대한 제대 권유가 활발해지고 나의 건강도 이제 회복된 것 같고 현역에서는 락오된 처지였으나 그래도 미련은 있고 해서 다시 퇴원하여 부대 배치를 받은 것이 부산 대연동에 있는 공병기지창의 보좌관 자리였다. 장기 입원한 경력이 현역에서는 적응이 안 되고 가족들을 여기저기 이사시켜 살림을 같이하니 모든 것이 힘이 들어 또 입원을 했다. 부산 5 육군병원이었다. 이번 입원은 군을 완전히 제대할 생각에서였다.

 

혁명군이 정권을 잡자 모든 행정면에서도 많은 쇄신이 있었다. 장기 근무한 군인에 대한 제대 년금제도 등을 새로 마련한 군인신분령이 공포되어 제대자에게도 년금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해당이 안 되었다. 근무연한이 20년이 되어야 해당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50.8.15 임관부터 계산해도 12년 근무에 최일선 전방 근무 3(1950~1953)3배로 가산하는 법을 적용해도 실적용은 6년 가산이 되어 계 18년 몇 개월밖에 안 되었다. 20년을 채우려면 2년을 더 복무해야만 하는데 그때의 심정으론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일시 퇴직금은 적용되기 때문에 그래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그해 62725일로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몸도 아직 좋지 않고 그야말로 심신이 피로해서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촌으로 일단 들어갔다가 때를 봐서 다시 재기하기로 다짐했다. 그때의 심정은 첫째, 그렇게 고생 많이 한 부모의 소원(논과 밭이 많고 누구에게나 구걸 같은 생활을 청산하는)을 다소나마 풀고 싶었고 둘째, 장기 입원한 탓에 심신이 피로해 좀 쉬고 싶었고 셋째, 편한 생활을 하고 싶었다.

 

제대하여 돌아왔을 때 내 나이 37, 처는 30세였다. 큰애가 초등학교 1학년, 은숙, 현자는 어렸다. 아직 젊은 나이였는데 왜 그렇게 늙은 기분이었는지. 여하튼 그럭저럭 농촌 생활은 계속되었다.

부모님은 일변된 생활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들 4형제와 손자, 손녀와 함께 생활하니 쌀 걱정 무슨 걱정 하는 식의 생활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동생 내외가 전시에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고 농사는 주로 동생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생활의 후원자 격이 되었고 좁은 집에 함께 생활하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경제적으로도 모르는 사이에 축이 나기 시작했다. 이때 사촌 영산형의 권유로 약 8천 평 되는 산을 샀다. 지금의 우리 산이다. 부모님의 산소로 작정했고 또 화목의 획득원으로 생각했다. 장차 여유 있으면 뭔가 개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족묘라도 확보할 생각이었다.

 

나는 1~2년을 촌에서 살다 보니 새로운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측은 어느 정도 하고 있었으나 많은 식구의 경제적 후원은 내가 모두 맡아 현실적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물론 나의 재기가 늦은 탓도 있었지만 주로 농토만 갖이고는 많은 지출을 감당하기에 너무 안일한 생활 설계였다. 부모님의 능력은 거의 없었고 형제 중 아무도 수입에 참여하는 그것도 없었다. 아직 나이 어린 형제뿐이니.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문제는 동생들 (희창, 희준)의 분가 문제가 첫째였다. 나는 아버지와 상의해서 분가를 결심하여 희창이를 거문배의 지금의 집을 쌀 20섬 값으로 구입하여 조건없이 주었다. 4마지기를 생활 기반으로 장차 명의 이전까지 약속했다. 희준이는 장차 촌의 그 집을 갖기로 하고 (내가 언젠가 도시에 나간 후에 밑천으로 하라고), 희양이는 어릴 때 중학, 고교, 대학까지 가는 비용으로 논 두 마지기를 이미 사용한 등록비 조로 계산했다. 그 밖의 재산은 내가 형편에 맞게 쓰기로 했다.

대략 이런 개념에서 생활은 계속되고 불편한 농촌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때그때의 문제해결 정도로 세월은 흘러갔다.

 

이것이 나의 군 생활에 기여한 공의 보상이었고 금액의 다과를 따지기 전에 이것이 나에게 주는 하늘의 성은으로 여기고 있다. 여기까지 기억나는 대로 쓰고 보니 결국 나의 활동의 끝을 맺는 것 같다. 지금까지 생활 기록으로 기술했다. 이후는 제대 후의 사회활동으로 이어져 나간다. 이제부터는 인생 일을 으로 쓰지 않고 특별한 일들을 으로 기록할 것이다. 따라서 연대순이 아닌 단막식으로 기록하여 그 당시의 상황과 나의 처신 내지 느낌을 반성함으로써 참고로 하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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