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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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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첫 전투 (신령 작전) 경상북도 첫 전투 (신령 작전) 경상북도 우리는 공병대였기 때문에 최전방에 지뢰매설과 철조망 가설 등을 실시하면서 한편 진지를 지키는 보병 전투 요원이 되기도 했다. 매일 매일 정신없이 그날의 임무에 충실했다. 소대원들도 충실했고 내 말도 잘 들었다. 오늘이 몇 일인지 알 수 없다. 아군의 포 소리는 계속되었고 가끔 쏘아대는 소총, 기관총 소리로 보아 아마 인접해 온 인민군을 발견한 모양이다. 이제는 아군의 총소리와 인민군의 총소리는 분간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이곳에 배속된 지 한 1주일 아니 10여 일 되었을까 하루는 19연대 CP에서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지도를 펴 놓고 설명하는 작전 장교는 주 저항선을 강화하기 위해 그보다 전방인 전초진지에 우리 소대를 배치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공병이고 또 소대원의 반이..
20. 소위 임관 1950.8.15. 소위 임관 1950.8.15. 이제 전황은 악화일로였다. 대구로 이동한 정부는 낙동강을 최후 보루로 삼고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유엔군도 속속 도착했다. 유엔군의 제트기가 매일 같이 북으로 날아갔고 그 비행기 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용맹스러웠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에 대구 경산에 도착했다. 초등학교였다. 우리는 후보생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다시 나머지 교육을 받기 위해 복잡한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예정보다 늦게 그 해 1950년 8월 15일에 드디어 소위 임관을 했다. 그동안에 인민군은 대구 이북 지방을 휩쓸고 낙동강을 사이로 쌍방이 일진일퇴의 상황이 계속되었다. 중부 전선은 한때 경북 영천까지 침투해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고 이제 대구도 풍전등화의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는 또 부산으로 ..
19. 배를 타고 후퇴 배를 타고 후퇴 천신만고 끝에 우리 일행은 군자면에 도착했다. 작은 어촌(오늘의 안산 반월공단)이었다. 이미 해는 수평선 너머로 저물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8명이었다. 다행히 소대장(교관)은 우리와 같이 행동을 하게 되었으나 우리는 본대와는 떨어지고 말았다. 타 보병들은 모두 흩어져 어디로 갔을까. 육지로 남하한 모양이다. 우리 일행은 시장끼를 느꼈다. 식사할 민가를 찾았으나 주민들이 피난 간 후인지라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빈집에서 약간의 콩을 찾아 볶아 먹었다. 피로로 지친 후의 요기가 금세 졸음을 불러왔다. 그러나 상황은 급하지 않은가? 포위가 되느냐 탈출을 하느냐 하는 순간이니. 아마 수원은 함락됐을 것이고 정부도 또 이동했을 것이니 말이다. 휴식할 여유는 없는 것이다. 모두들 ..
18. 수원에서 수원에서 우리는 급히 수원으로 이동하기 위해 출발했다. 물론 도보로 가는 것이다. 집결지가 수원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는 도중 안양으로 바뀌었다. 안양에 방어진을 친 보병 부대장의 명령이었다. 우리는 부대 체제와 조직력을 갖지 못한 소수 인원이었고 당시만 하더라도 주력 부대장의 ‘즉결 처분권’이 있어 불복하면 총살을 면치 못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세하기로 하고 그날 안양과 시흥 사이의 낮은 고지에 배치되었다. 서울은 완전 함락됐다고 그 부대원이 말해준다. 서울을 빠져나온 피난민들은 국도 통행이 통제되어 있기 때문에 논길, 산길로 피난 행렬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무기도 없이 이곳까지 왔는데 비로소 이곳 부대원이 소총을 한 자루 준다. 그 총은 일제 구구식 소총으로 내가 일..
17. 서울 광장교(광나루) 폭파 1950.6.28. 서울 광장교(광나루) 폭파 1950.6.28. 우리들은 광장교의 서울 쪽 교각이 있는 곳에 폭약을 쌓기 시작했다. 철교 파괴에 필요한 폭약량은 이미 계산해 놓았으나 수량이 문제가 아니었다. 교량의 완전 차단이 목적이었으므로 필요 이상 요소요소에 장전을 했다. 그리고 도폭색으로 모두 연결시켜 마지막으로 휴즈라이타(뇌관)를 3개소 설치하고 몇 번이나 상태를 확인했다. 그동안에도 군인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피난민이 폭약을 쌓아 놓은 사이사이로 통과함으로 우리는 조마조마했다. 고함소리, 욕소리 속에서 도폭색이 혹 끊어지지나 않을까 해서다. 6월 28일이 되었다. 그날 북괴 탱크가 서울 시내에 나타났다. 이제는 서울의 함락 순간이 왔다. 아직 다리까지는 진출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마음만 급하고 초조하다. 소..
16. 1950년 6월 25 1950년 6월 25 아침 일찍 일어나니 기분이 상쾌하다. 집 앞의 배나무가 싱그럽다. “형님, 오늘 날씨가 좋아요.” 하니 붙임성 좋은 서울 토박이 형수님이 “서방님 오늘 구경 잘 하시겠수.” 하고 웃으시며 부엌일이 바쁘시다. 그런데 숭의동 앞 신작로를 오가는 사람들의 거동이 바쁘고 심상치 않다. 뭔가 떠드는 소리가 요란한데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고 급히 집 앞을 지나간다. ‘시민 여러분, 북한군은 금조 4시 남한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여러분은 당황하지 말고 라디오나 속보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라며 군인, 경찰은 속히 원대복귀 해주시기 바랍니다.’ 요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그동안 38선 부근 특히 개성 송악산에서의 소규모전투가 자주 ..
15. 사관 후보생 지원 1950. 2.1 사관 후보생 지원 1950. 2.1 당시 경기도 시흥에 있던 보병학교에서 3개월, 후반기 3개월은 김포에 있는 공병학교에서 교육받기로 되어있다. 51통신대대에서 많은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드디어 2월 1일에 입교했다. 과연 훈련은 심했다. 쉴 시간조차 없는 교육계획표는 나를 긴장시켰다. 매주 한 번씩 있는 시험도 그랬고 특히 암기하고 복창하는 대목에 와서는 나를 당혹케 했다. 서툰 말씨는 동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남보다 이중 삼중의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기에 인간 멸시로 대하기보다 차라리 애교로 취급해주었기에 마음은 편했다. 이 훈련은 나 자신이 조국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이요 또한 나의 인생을 살찌게 하는 과정이기에 일본에 있을 때와는 그 근본 목적이 달라 나에게 있어 희망을 품게 해주었..
14. 조선 경비대 입대 1948.2 조선 경비대 입대 1948.2 그렇게 생활은 계속되었는데 하루는 부락 이장이 나를 찾아왔다. 영환이 너는 일본 군대도 갔다 오고 공부도 했으니 말도 배울 겸 경험을 얻기 위해 조선 경비대에 입대하면 어떻겠냐고 하신다. 조선이 독립하면서 자위를 위한 군대는 필수적이라 절대적으로 유망하니 출세도 할 수 있을 거고 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지 모른다고 하신다. 나는 일본 군대에서 지독할 정도의 경험이 있어 다시는 군대는 안 가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촌구석에서 또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싶었다. 무위도식하면서 식량을 축내는 것보다 나 하나만이라도 입을 덜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장남으로서의 사명감과 이런 계기를 내 능력으로 이겨보겠다는 신념마저 갖게 되었다. 조선말도 제대로 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