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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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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 (1950. 10. ?)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 1950. 10. 연대장은 임부택 중령이었다. 연대장은 침통한 목소리로, “전 장교는 잘 들어라. 우리는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곳에 왔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싸울 것이다. 정보에 의하면 우리 국군은 전 전선에서 승리를 거듭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고 특히 우리 연대는 제일 먼저 압록강에 도달했다. 각 전선에서도 모두 한만 국경선에 도달 직전이고 우리는 이제 남북이 통일되는 영광을 갖게 된 이 시점에서 뜻밖에도 은밀히 중공군이 이 땅에 침투하여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비통한 현실에 작전상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니 각 부대는 속히 인원 장비를 확인하고 오후 6시에 출발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이어 ‘각 장병은 실탄은 충분히 가져라..
28. 희천에서 압록강으로 희천에서 압록강으로 차는 계속 산길만 달렸다. 산, 산……. 울창한 산만 바라보며 우현령을 넘어 우측으로 북향을 했다. 바로 가면 운산군 온정리로 간다고 한다. 초산군으로 들어서면서 눈이 약간 날린다. 벌써 그런 계절이 된 걸 보니 10월인가, 11월인가. 날짜 가는 줄 모르고 달려왔다. 이 길로 따라가면 압록강이 보이고 바로 그 전이 초산이라고 들었다. 얼마나 왔을까. 한없는 북진에 지루함까지 느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도 꽤 넓은 땅이었다. 밤늦게 초산을 앞두고 고장(古場)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도착하여 숙영하기로 했다. 전방의 선발대는 이미 초산에 진입하여 압록강에 도달했다는 신나는 소식과 함께 압록강 물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곳이 압록강 후방 7연대 본부가 앉는..
27. 희천에 진주 희천에 진주 희천이 가까워지는데 어떤 광산촌에서 인민군 여군을 포로로 잡았다. 네 사람의 젊은 간호원이었다. 먼저 간 일행에서 낙오됐다고 한다. 각 소대 차 운전석에 나누어 태우고 차 안에서 신문을 했다. 의외로 답변을 잘해 호감마저 느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평양에서 왔다며 간호원으로 갔다가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란다. “이름은?” “⭕⭕⭕” “나이는?” “스물 하나예요.” “집은? 고향 말이야?” 집은 희천에서 얼마 안 되는 개고(价古)라 하고 만포진 가는 도중이라 한다. “집에서는 뭘 했나?” 집에서는 농사짓고 자기는 인민학교 선생이라고 한다. 학교는 희천서 나왔다고 먼저 대답한다. 그 여자는 나의 신문에 겁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하는데 국군과 인민군의 대화 같지 않다. 다리가 아픈 터에 고맙게..
26. 38선 이북으로 진격 1950. 10 38선 이북으로 진격 1950. 10 드디어 북진명령이 하달되었다. 6사단 사령부에 모인 사단 전 장교에게 사단장은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 국군은 不意의 인민군의 침공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지원으로 38선 이남은 다시 수복하고 민족상잔의 비극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이제 우리는 북진하고자 한다. 이미 김일성은 북쪽으로 도주했으나 우리는 새로운 사명감으로 이 統一聖戰에 최후의 승리를 걸자.'며 진격 시의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진격 시기는 내일 새벽이라고 했다. 부대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미 준비는 완료된 상태다. 그러나 북쪽의 지리에는 어둡다. 전에 이북에 다녀온 바 있는 노인들을 찾아 정보 얻기에 바빴고 그 결과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다음날 아침 일..
25. 38선까지 북진 38선까지 북진 그날 우리는 홍천을 거쳐 춘천으로 갔다. 홍천은 중부지방의 교통 요충지인지라 춘천과 인제 쪽으로 가는 군용트럭과 행군하는 보병들 그리고 주민과 수복하는 피난민 때문에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혹시 피난민 속에 인민군이 있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으나 검문소의 헌병들의 검문도 엄한 것 같았다. 이미 인민군은 산에 숨은 공비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춘천에 들어서니 역시 강원도 도청 소재지답게 많은 주민이 오고 가며 군인들의 행렬도 빈번하다. 선두를 다투어 국도 혹은 지방도로 진출한 국군들이 이곳에서 합류하였기 때문에 혼잡은 대단하였다. 인민군이 불시에 침략한 6.25때부터 약 3개월 반쯤 되었을까? 남한을 거의 유린한 김일성의 만행도 역사 속에 민족적 汚點만 남기고 국토는 황폐되었다. 그 많..
24. 양평에서 양평에서 양평 가까이 왔을 때 이곳은 아직 국군의 반격 소식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민가도 부락도 아직 무인지경이다. 아마도 인민군의 주도권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 후 전방 도로상에 일단의 인민군이 걸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우리는 긴장하며 캬리바 기관총으로 달리면서 사격을 하니 인민군은 기겁을 하면서 논으로 뛰어들었다. 불시에 국군의 사격에 놀랐을 것이다. 우리는 사기가 충천한 터에 누구의 명령도 없이 일제 사격을 했다. 인민군은 벼 익은 논에서 꼼짝도 안 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벼 이삭조차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 이상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보다 더 큰 규모의 인민군이 혹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양평 시내를 먼저 수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양평 가까이 왔을 때 ..
23. 충주에서 추석을 충주에서 추석을 이런 감격스런 진격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고 주야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우리는 진격의 쾌감을 맛보았다. 그동안 숨어있던 주민들이 국군의 수복 소식을 듣고 눈물의 환영과 함께 온 천지가 환희의 도가니였다. 국도 길가의 부락을 지날 때마다 만세 소리는 이어졌고 감격스런 순간순간으로 어느새 우리는 충주 목계까지 왔다. 목계에 와서 강에다 아라이꼬시 (차량 통과를 위하여 가마니로)를 만들었다. 가마니는 인근 면사무소에 가서 징발했다. 후속 부대가 속속 강을 건넜다. 이곳에서도 주민들의 환영은 대단했고 농악대가 나와 풍장 소리, 북소리, 장구 소리로 완전 축제 분위기였는데 알고 보니 이날이 바로 추석이라고 했다. 날이 가는 것도 모르고 지낸 우리가 아닌가. 논의 벼 이삭도 누렇게 익어간다. 내일..
22. 北進 북진 9월 27일 아침은 맑고 조용했다.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제트기가 북쪽을 향해 소리도 요란하게 ‘쌕’하고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전선은 이상할 정도로 소강상태다. 우리는 오전에 19연대 배속에서 해제되어 공병대대로 복귀했다. 본대에 도착하니 부대원이 모두 바쁘게 이동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어느 전선에 배치될 것인지. 그날은 이동을 위한 준비에 하루가 갔다. 이동 내용이 궁금하였으나 말단 소대로서는 알 수 없었고 밤이 되니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여름밤은 짧았다. 날이 새니 주위가 어수선하다. 대대본부로부터 명령이 하달됐다. 목적지는 안동이라 한다. 상황은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인민군이 모두 퇴각한다는 것이다. 이게 웬일인가! 아침 식사를 일찍 마치고 흥분 속에 출발 준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