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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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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초등 군사반 교육중 휴전 초등 군사반 교육중 휴전 나는 김해 공병학교에서 소정의 교육을 받었다. 나의 동기생들도 서넛 있었다. 서로 임관 이후 처음 만나는 친구들로서 할 말도 많았고 들은 이야기도 많았다. 3개월 동안의 교육 중에 느낀 것은, 첫째, 전방에서 복무하는 군인은 진짜 애국에 불타는 사람들이라는 것. 둘째, 전방에서 복무하는 군인은 사리사욕이 없다는 것. ‘그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셋째, 전방에서 복무하는 군인은 인생관의 기준이 특별하게 없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뭣을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라고. 참으로 전방에서 복무하는 군인은 애국자가 아니었던가. 오로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나라의 운명에 몸 바쳐 그 많은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죽음에 임했을 때에도 비겁하지 않고 미련을 버리며 당당한 마음으로 ..
36. 금성천 전투 1952~1953 금성천 전투 1952~1953 금성천 전투는 휴전을 앞두고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던 곳이다. 금성 평야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19연대가 방어하고 있던 이른바 A고지, B고지로 일컫는 감제고지(瞰制高地)를 사수(死守)하는 진지에 있었다. 낮에는 국군이 야간에는 중공군이 뺏고 빼앗기는 그런 중요한 고지였다. 몇 달 동안 한 진지를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이 고지를 탈취당하면 금성천 유역 평야는 물론 우리의 전체 방어선이 후퇴하게 되고 국군 전방의 방어선 균형이 깨어져 불리한 형세로 되기 때문에 각 부대는 그야말로 많은 병력과 장비를 투입하여 사수했다. 당시 백마고지 김화고지 등 중부와 서부에서의 혈전은 지금까지 그 기록이 말하듯 어느 전선을 막론하고 소홀히 할 진지는 없었다..
35. 다시 前方으로 다시 前方으로 그동안 우리는 회남면 신곡리에 있는 회남국민학교에 숙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지금의 처 양한례를 만났다. 피난 오다 가족들과 헤어져 친구와 함께 피난 가는 도중 나를 만난 것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껏 같이 살고 있지만 그때는 작전상 이동이 심했기 때문에 후일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물밀 듯 남하하던 중공군도 유엔군의 맹반격에 38선 부근에서 저지되어 일진일퇴의 상황이 계속되었다. 전투는 더욱 심해졌다. 우리도 결국 악전고투 끝에 또 춘천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금대, 양구, 금성까지 왔다. 이 무렵 미국과 중공, 소련 양쪽에서 휴전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었으나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한 치의 땅이라도 영토확보에 혈안이 되어 매일같이 전투가 계속되고 우리도 그런 상황에서 보병..
34. 고향에 들러 고향에 들러 나는 그 길로 떨리는 가슴을 안고 고향에 들렀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만 계셨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보은 외가로 피난 갔다고 한다. 크게 실망했으나 아버지가 계셔서 그동안의 일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여전히 집은 가난에 시달린 흔적이 눈에 띄었다. “아버지, 어떻게 사셨어요? 얼마나 배를 곯았어요?” 하니 아버지는 “염려 말어라. 그동안 네가 장교이기 때문에 면사무소에서 매월 한 가마니의 쌀 배급을 받어 큰 걱정이 없었다.”며 나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날 나는 미리 준비한 돼지고기를 내놓아 즉석에서 구워 먹으니 아버지는 정신없이 잡수신다. “아버지, 많이 잡숫고 기다리세요.” 하며 나는 집을 나왔다. 아버지의 눈물을..
33. 1.4 후퇴 (1951. 1.4) 1.4 후퇴 1951. 1.4 우리 유엔군은 작전의 폭을 넓히고 전방과 후방의 종심을 길게 했다. 그래서 우리 6사단 공병대대는 동두천 의정부 서울을 거쳐 경기도 용인 그리고 진천까지 오는 도중 도로의 정비 작업에 임했다. 후퇴하는 미군의 장비가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6.25 후퇴 시와는 다른 작업개념이었다. 추운 겨울의 후퇴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또다시 서울 시민의 피난길 그리고 이북에서 내려오는 피난민과 합쳐 어느 국도, 지방도를 막론하고 피난민으로 꽉 차서 남으로 내려간다. 때마침 내리는 눈은 금세 은세계를 이루었다. 피난민의 비통한 마음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피난민의 행렬은 우리가 작업하는 길을 한없이 지나가고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다. 부모를 잃고 자식을 잃고 서로 친..
32. 포위 9일 만에 원대복귀 (1950. 11월) 포위 9일 만에 원대복귀 1950. 11월 이렇게 하여 우리는 국군과 조우했다. 9일간의 포위망 통과는 이제 끝이 났다. 우리는 연대 본부로 후송되고 이어 6사단 공병대대로 복귀했다. 나의 3소대는 정원 30명이었으나 그날 확인하니 13명이었다. 용케도 잘 빠져나온 사병들이었다. 그다음 날부터 한 사람, 한 사람씩 복귀하여 한 달 후에는 20여 명이 되었다. 북창은 꽤 큰 마을이었다. 평안남도 맹산군 북창리라 했다. 군청소재지는 맹산인데 이곳에서 얼마 안 된다고. 이곳에서 6사단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보급도 이때부터 좋아졌다. 복장도 장교다운 옷으로 바뀌었고 운동화 대신 가죽으로 만든 미군의 워커 구두까지 지급 받았다. 우리 3소대의 인원도 보충받았다. 아직 포위망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가 됐는지 그렇지..
31. 패잔병으로 패잔병으로 강을 건넌 나는 이곳에 국군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미 수일 전에 철수한 것을 알았다. 실망이 깊었으나 별도리가 없어 남하를 계속하였다. 일행은 불과 다섯 명이었다. 강을 건너와서 다른 길로 간 국군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강을 건너와 보니 이곳 일대는 산간지대이고 작전 지역에 들지 않음으로 부락마다 주민들도 있었다. 다행히 적개심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중공군의 침입으로 남북통일이 다시 요원해졌다며 자주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위험 없는 탈출을 할 수 있었다. 때로는 주민의 손으로 지은 강냉이밥을 얻어먹으며 오랜만에 레이숀에 길들인 뱃속을 우리 양식으로 채웠다. 패잔병이 되어버린 우리는 조직적인 군대가 아니고 유격대와 같은 존재여서 하루속히 원대를 찾아가는 것이 ..
30. 청천강 도강 청천강 도강 그 후 우리는 계속해서 산으로 올라 밤낮으로 능선을 탔다. 그래도 우리는 식량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펄펄 나는 것 같았다. 밤낮으로 강행하는 남하 행군은 잠을 못 이루는 것 외에는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특히 야간에는 가다가다 쉴 때마다 잠이 들어 선두와 이탈하는 일이 많아졌다. 수백 리는 온 것 같았다. 어쨌든 우리는 청천강 근처까지 왔는데 강을 앞에 두고 도강에 대해 고민이 되었다. 그때부터 부연대장은 공병대가 앞장서라고 했다. 정확한 인원은 얼마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미 무기력해진 우리 집단이다. 드디어 청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지까지 왔다. 그대로 내려가면 강일 것이다. 강의 폭과 깊이는 물론 도하지점도 잘 모른다. 나는 한참 동안 주저했다. 알 수 없는 지형지물에 더욱이 이 부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