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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기

넓은 벌 동쪽 끝으로...

그곳은 많이 달라져 보였다. 잃었던 향수를 다시 찾은 기분이랄까. 죽은 도시 아니 죽은 소읍에 새 생명을 불어넣듯 생기가 돌고 있었다. 옥천은 20여 년전 한때 내가 일하면서 정을 붙이기도 했던 곳이라 내게는 고향을 다시 찾아가는 느낌이다. 물론 정지용의 고향과는 질적 차원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얼룩배기 황소가 게으른 울음 우는 곳이 나는 막연하게 월전리 어디쯤이라고 상상해 왔다. 그런데 이석우 시인이 쓴 글을 보니 지용이 뛰놀던 곳은 월전리 쪽이 아니라 수북리 어디쯤이라고 했던 것 같다. 아마 지용의 생가가 구읍에 있는 것으로 보아 넓은 벌 동쪽 끝이면 수북리 쪽이 맞을 것 같다.

우선 생가부터 들렀다. 소박한 담장 아래 붉은 백일홍이며 봉숭아꽃, 키 높은 해바라기가 이미 손님맞을 준비를 마쳤고 마당에는 예전에 없던 황소 조형물도 들여놓았다. 초가 담장 위에는 9월의 따가운 햇살에도 연한 조롱박이 가을맞이 채비를 하고 있다. 삽작을 들어서니 예전처럼 우물터가 있고 작은 초가는 내 어릴 적 살던 우리 작은집과도 흡사했다. 지용이 뛰어놀던 때에는 조형물이 아닌 진짜 얼룩배기가 있었을 것이고 초가 담장 아래는 나지막히 채송화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집 마당에서 뛰쳐나와 너른 들을 쏘다니며 그는 많은 상상을 시로 산문으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학원 순례와 틈만 나면 게임에 열중하느라 시간에 쫓기며 사는 요즘 어린이들을 생각하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문학관 앞에는 구읍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커다랗게 걸려있어 들여다보니 내가 알지 못했던 곳도 몇 군데가 있다. 우선 옥주사마소를 찾았다. 사마소는 조선시대 지방 고을에서 과거시험 합격자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이라 한다. 과연 옥천이라는 곳이 인물이 많이 나고 정치에 관심이 높은 곳이라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마소는 방이 하나로 통하게 되어있어 많은 유생들이 모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예전에 죽향초등학교에 홍보를 하러 갔던 것 같은데 학교 모습만 생각이 나지 가는 길을 잘 모르겠어서 가까운 거리임에도 네비친구에게 의존해야 했다. 지용과 육영수 여사가 다녔던 학교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녀가 공부했던 校舍는 옥천을 대표하는 최초의 공립학교 교사라고 한다. 2003년 6월 30일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어서 그랬을까, 내가 다니던 청주중앙초등학교 건물도 온통 붉은 색이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휴일이라 그런지 관리하시는 분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다음은 육영수 생가를 찾았다. 전에도 가본 적이 있지만 혹시나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 싶어 들르기로 했는데 가는 길이 참 인상적이다. 전에는 없었는데 길가에 예쁜 카페가 있고 생가 앞에는 넓은 연꽃지가 펼쳐져 있다. 다음에 연꽃을 촬영하려면 이리 오면 되겠다 생각하며 생가로 들어섰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지만 정치색을 떠나 한 여자로 보면 누구에게나 귀감이 되는 인물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영부인으로서 대통령을 내조, 보좌하고 전형적인 한국인의 여성상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문득 이 넓은 부잣집 딸과 사랑에 빠져 가슴 설레었을 박정희 전대통령을 떠올렸다. 그에게도 수줍음이 있었겠지?

 

생가 바로 옆에 향교가 있는 줄 몰랐었다. 이왕 나선 김에 그곳도 들러보기로 했다. 어차피 향교라는 곳이 건물 외에는 보여주는 것은 별로 없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는 느낌이 들었고 정갈하게 관리도 잘 되어있었다. 이곳에서 유교문화를 가르치고 이것으로 지방 사회질서도 바로 잡았던 사회문화의 기초기구 역할을 했던 곳이니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으리라.

 

 

다음은 교동저수지를 찾아간다고 한 것이 선사유적지 주차장이 나왔다. 몇 개의 솟대만 있을 뿐 다리를 건너 안터마을로 들어가니 그곳에 진짜 유적이 있다. 고인돌과 선돌이 있는 것이다. 고인돌은 주로 무덤의 역할을 했으며 선돌은 고인돌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데 고인돌에 묻힌 사람을 나타내는 기념비적 기능과 수호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 한다. 선돌 아래부분에 커다랗게 원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임신한 여자일 거라고 추측을 한다니 마음이 짠해졌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배가 출출해오기 시작했다. 안터마을에서 장계리쪽으로 가지 않고 뒤로 다시 5Km 이상을 돌아나와 삼거리에 있는 올갱이국밥집으로 향했다. 코로나때문에 일찌감치 문을 닫은 상태여서 다른 올갱이집을 검색해서 저녁을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지금 올거냐고 묻기에 그집도 일찍 문을 닫으려나보다 하고 서둘러 차를 몰았다. 식당에 들어서자 주인 세 명이 눈을 의심하는 듯 전화한 사람이냐고 묻는다. 아마 일행이 더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한 모양이다. 퇴근하려다가 전화받고 기다렸단다. 어찌나 민망하고 당황스럽던지 식사하는 내내 좌불안석이다. 이것도 시대를 감지못한 내 탓이리라. 코로나 역병에 힘들어하는 그들에게 어찌 타박을 할 수가 있겠냐 말이다. 연거푸 미안하다며 포장 하나를 더 주문해서 식당 문을 나섰다. 어머나! 세상이 달라졌다. 서쪽에서 노을이 펼쳐지는데 개천까지 빨갛게 물을 들였다. 자그마한 소읍을 온통 붉게 물을 들여 놓았다. 내 마음도 노을에 함께 젖어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얼룩배기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울던 넓은 벌 동쪽 끝이 어딘지 결국은 찾지 못했다. 아마 교동 저수지 근처인 것 같은데 나의 네비는 늘 내가 모르는 곳은 그도 못 찾는다. 어차피 시간적 여유도 없었으니 다음 기회에 다시 한 번 찾아가기로 한다. 그때는 예쁜 카페에도 들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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