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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기

보길도와 윤선도

고산 윤선도의 유적을 따라 보길도에 들어갔다. 조선 시조의 대표인 <어부사시사>가 탄생한 이 곳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란 기대감이 발길을 이끌었다. 완도 화흥포항에서 배를 타고 35분쯤 가

노화도의 동천항에 도착했다. 노화도에서 보길도까지는 자동차로 이동하며 풍랑을 만났을 당시의 고산을 상상했다.

윤선도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세상을 등지려 제주도에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 보길도의 황원포를 통해 들어오게 된다.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심취한 윤선도는 이곳에 거처하기로

하고 학문에 몰두하며 제자를 가르치는 등 세상을 잊고 지낼 수 있었다.

 

 

세연정(洗然停)

 

세연정은 윤선도가 보길도에 들어와 살 집을 마련하고 얼마 후에 마련한 정자이다.

이곳에서 책을 읽고 뱃놀이도 하며 자연을 벗삼아 지냈는데 <어부사시사> 창작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지은 한시로는 <혹약암(或躍巖)>,<동하각(仝何閣)>등이 있다.

 

 

 

 

동천석실(洞天石室)

 

부용동이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에 있는 동천석실은 신선이 사는 곳을 동천복지라고 부르던 데서 따온 이름이라한다.

한 평짜리 집인 이곳에서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취사는 물론 아래에는 침실을 따로 두기도 했다.

차를 다려 마시던 차바위, 격자봉까지 줄을 이어 물건을 운반하는데 쓰였던 용두암이 있다.

동천석실 바로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암석을 파서 인공으로 만든 석담이다.

동천석실에서 즉석으로 지은 한시 <오운대즉사(五雲臺卽事)>가 있다.

 

삼오운대에 베개 높이 하고 누우니

산 너머로 뜬구름 지나가네.

깊은 골짜기에서 솔바람  소리 들리더니

맑은 바람이 내 왼편에서 불어오네.

 

 

 

낙서재 (樂書齋)

 

낙서재는 윤선도가 1637년 보길도에 들어와 1671년 임종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에는 수목이 울창해서 산맥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그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잡은

낙서재 입지는 보길도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라고 한다.

이곳은 강학하고 독서하면서 소요하고 은둔하고자 하는  선비의 생활공간이었다. 처음에는 이엉으로 지붕을 엮은 모옥으로 살다가 그 뒤에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었는데 후손들에 의해 와가로 바뀌었다.

 

낙서재

 

한 줌 띠풀로 지은 집이어서 비록 나직하여도

다섯 수레  서책은 많기도 하여라

어찌 다만 내 근심만 삭인다 하리요

거의 나의 허물을 고치는 데에도 도움되리라.

 

 

격자봉

 

넓은 파도 큰 물결 가운데

우뚝 선 채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네.

임금 계신 궁궐에 나아갈 마음이 있거든

저 부끄러운 줄을 알고 선을 행해야 할 것이네. 

 

 

 

곡수당(曲水堂)

 

고산의 아들 학관이 거주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공간으로, 낙서재 골짜기에서 흐른 물이 이곳 인근에 이르러서 곡수를 이루었다 한다.

 

 

<어부사시사>는 고산이 65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보길도 부용동에 들어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노래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과 한몸이 되어 강호한정에 빠지는 것이 주제이다.

사계절을 각 10수씩 40수로 하고 여음이 붙어있다. 여음은 배를 띄우는 것에서부터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따라 말을 붙였다.

 

40수 중 [하사 1]

 

궂은 비 멎어 가고 시냇물이 맑아 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메니 기쁜 흥을 금할 수 없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연강첩장(烟江疊嶂) 누구라서 그려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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