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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칼럼-강현자의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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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여 잡초여 2021.04.28 내 오늘은 결단을 내리라. 호미를 들고 나선다. 마귀할멈의 매부리코 같은 호밋날이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고랑 끝으로 가서 해를 등지고 앉는다. 모자챙에 그늘이 매달린다. 호미 끝에 사각사각 경쾌한 소리가 묻어나온다. 이미 마귀할멈의 콧노래가 시작되었다. 비죽이 뻗어나간 바랭이의 허리춤을 한 손으로 거머쥐고 호미가 호령을 하면 싸라기 같은 개미알들이 우르르 딸려 나온다. 화들짝 놀란 달팽이도 숨을 곳을 찾느라 분주하다. 호미 끝에 묻어나오는 흙냄새가 상큼하다. 사각사각 흙을 헤집을 때 나는 소리는 상념에 젖는 내게 잔잔한 배경음악이 되어준다. 풀을 뽑는 동안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밀려났던 생각들을 한데 불러 모은다. 잊고 지낸 고마운 사람들 생각에 절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면..
미련과 밥은 2021.3.31 미련과 밥은 시동을 걸자 주유 계기판이 빨갛게 쏘아 본다. 급한 마음에 앞차의 꽁무니에 바짝 따라붙었다. 그 앞차의 앞에서 달리는 탑차가 시야를 막아선다. 음식 관련 회사의 수송 차량인 것 같다. 자연스레 나의 시선은 그 탑차의 등허리에 머문다. 차를 운전할 때면 으레 앞차의 번호판을 보게 된다. 차량번호 네 개의 숫자를 가지고 해석을 하거나 두운을 맞춰가며 쓸데없이 뇌의 기억장치 회로를 작동시키려 드는 것이다. 차량번호가 ‘8947’이면 ‘팔구 샀지. 아하, 팔고 새로 샀구나.’ 뭐 이런 식이다. 그런데 오늘은 앞차의 번호판이 보이는 게 아니라 그 너머 탑차에만 눈길이 갔다. 커다랗게 쓰인 두 줄의 카피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미련과 밥은’ 그리곤 다음 줄에 있을 문구가 보이지 않는다. 궁금하다...
봄을 캐며 /2021.3.17 봄을 캐며 강현자 드디어 함진아비가 지고 온 함을 대지에 풀어놓았다. 이제 더는 봄이네 겨울이네 주춤거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턱 끝에 닿는 기운이 목화솜처럼 부드럽다. 운동을 끝내고 친구와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나물 캐러 가기로 마음을 모았다. 오창 저수지 근처로 향했다. 버들개지가 벌써 포슬포슬 솜털을 입었다. 여기저기 만물이 잠에서 깨느라 속살거린다. 아직은 군데군데만 파릇하다. 나비를 쫓아가는 어린아이처럼 우린 이리저리 냉이가 있을 만한 곳을 살폈다. 어느새 뽀얀 쑥이 쑥쑥 올라오고 있다. 신부의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처럼 작은 꽃을 피운 꽃다지도 눈에 띈다. 낯이 붉은 나싱개도 벌써 꽃대를 밀어 키를 높였다. 집 안에서는 아직 겨울인 줄 알고 봄을 기다리기만 했다. 이렇게 마중을 나오면 일찍 ..
내 탓이오 내 탓이오 강현자 직진 신호가 떨어졌다. 전봇대에 가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보이지 않았으나 당연히 초록불이겠지 생각하고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도로 한가운데로 들어서서야 아차 싶었다. 오른쪽에서 요란한 경적과 함께 승용차가 내 옆구리로 바짝 다가와 멈췄다. 깜짝 놀란 나는 그 자리에 섰다. 신호등을 보았다. 빨간불이었다. 왜 그랬을까 후회막급이다. 콩콩 뛰는 가슴을 간신히 누르며 죄송하단 말만 연발했다. 상대방 운전자도 얼마나 놀랐을까. 늘 다니는 길인데도 신호체계를 착각한 것이다. 욕을 바가지로 먹을 생각을 하니 너무도 창피하여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는 차창 밖으로 나를 보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출발한다. 더 미안했다. 유난히 파란 하늘 아래 내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사람마다 ..
명절소경 방앗간 모터 소리는 기염을 토했다. 희뿌옇게 올라오는 김 사이로 설핏설핏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피었다. 어머니는 이미 홑이불을 뜯어 빨아 풀을 먹이고 때가 찌든 그릇은 빨간 이쁜이 비누로 수세미질을 하셨다. 다락방에 잠자던 세간이 줄줄이 출두하고 어머니의 손발이 빨라지기 시작하면 명절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맏며느리의 명절 준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동서들의 일정을 확인하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정해진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반죽은 셋째가 해야 차진 맛이 나고 전은 막내가 해야 얌전하게 부쳐진단다. 어린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긴 했다. 그러니 일의 절차나 순서에 따라 동서들이 시간 맞춰 나타나지 않으면 어머니는 불호령을 내리셨다. “죄송해유, 형님.” 하면서 종종걸음으로 들어서는 작은엄마...
덫(2021. 2.3) 덫 강현자 얼마나 무섭고 추웠을까. 내복 바람으로 거리를 헤매는 세 살배기 아이를 이웃 주민이 구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수은주가 종일 영하 두 자릿수로 곤두박질한 그야말로 엄동설한이다. 흠뻑 젖은 속옷이 얼어붙은 채 거리를 헤매는 아기가 내 손주 같아 마음이 출렁 내려앉는다. 나 역시 여섯 살 때 시장에 가신 엄마를 찾아 나섰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다. 혼자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의 두려움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엄마가 일을 나간 사이 아가는 엄마를 찾아 밖으로 나왔다가 문이 잠겨버렸다는 얘기다. 이런 일은 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다는데 아이를 방치한 엄마의 무책임이 사람들을 분노케 한다. 돌아서면 저절로 잠기는 자동문을 설치해놓고 엄마는 얼마나 마음 든든했을까. 늦게 귀가하는 가족이 있으면 대문..
13월( 2021.1.20) 13월 강현자 카톡 소리에 눈을 떴다. 이미 떠오른 햇살이 차가운 눈길로 나를 들여다본다. 휴대폰에 박힌 빨간 숫자들을 하나하나 지우다가 어느새 그 세상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다 다시 돌아눕고 기지개 한 번 켜고 또 돌아눕는다. 그렇게 뭉그적거리다 그예 늦잠을 자고 말았다. 늘 몸이 찌뿌듯한 건 순전히 날씨 탓이라며 나의 게으름을 슬그머니 뒤로 숨긴다. 한낮에도 영하라니 추위에 약한 내겐 맞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마음이 편치 못하다. 너무 추워서 한 발도 내딛지 못하고 마음마저 얼어붙었다. 규칙적으로 하겠다던 운동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날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봄이 되어야 뭔가 힘차게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새해를 맞은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암울했던 2020년을 ..
잠시만요 2021. 1. 6 잠시만요 강현자 벌써 삼 일째다. 짐을 싼답시고 집 안을 온통 뒤집어놓았다. 반듯하게 각을 잡던 정든 책상은 이미 나를 외면하듯 삐딱하게 서 있고 나사 빠진 의자는 힘에 겨운 듯 덜겅덜겅 숨을 몰아쉰다. 마룻바닥은 허옇게 긁힌 상처가 안쓰럽다.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매일매일 쓸고 닦으며 자그마한 티끌 하나에 눈을 희번덕거리지 않았던가. 어느 구석에서 나왔는지 둘둘 만 포장지가 고개를 든다. 지난 어린이날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남은 포장지였다. 동전 하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헛기침을 해댄다. 어처구니없는 쉬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백 원씩 벌금을 내라며 엄포를 놨던 생각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십 년 넘게 운영하던 공부방을 접었다. 이제 남들처럼 평범한 거실을 꾸밀 수 있다. 수리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