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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매일 칼럼-강현자의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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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 얼굴 억울하다. 안경 너머 자글자글 늘어진 잔주름이 묻지도 않는 나이를 일러준다. 가뜩이나 예쁘지도 않아 웃는 모습밖에 내세울 게 없는 얼굴인데 그걸 다 가리고 눈만 빠꼼이 내놓으란다. 내 눈은 크지도 않고 속눈썹도 짧아 볼품이 없다. 그러니 왜 억울하지 않겠는가. 여름 방학식을 끝내고 학원에 온 몇몇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깜작 이벤트에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마스크를 잠깐 내린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얼굴이 낯설다. 만난 지 6개월이나 되었건만 이제껏 내가 보아왔던 아이들이 아니다. 턱살이 통통한 아이, 입술이 얇은 아이, 코가 큰 아이……. 몇 개월을 함께 지냈는데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현빈이 얼굴이 이랬었어? 지우도? 민영이도?” 아이들도 나도 한바탕 웃었다. 여태껏..
나팔꽃/2021.7.21 나팔꽃이 피었다. 반갑다. 꽃이 어른 주먹만 하니 보기만 해도 입이 절로 벌어진다. 몇 해 전 지인에게서 씨를 얻었는데 워낙 꽃이 크고 색이 고와 해마다 씨를 받아 화분에 심었다. 그러던 것이 작년에는 씨앗 둔 곳을 몰라 심지 못했었다. 올봄 우연히 씨앗 봉지를 찾은 것이다. 심을 때만 해도 한 해를 묵은 씨라서 과연 싹이 날까 의심스러웠다. 반신반의하며 며칠을 지켜보니 봄볕은 나팔꽃 화분에도 공평하게 은총을 베풀었다. 용케도 싹을 틔워 줄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묵은 씨라 그런지 여름이 익어가도록 이파리만 무성했다. 관심이 점점 무뎌갔다. 늦잠에 겨운 아침마다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드디어 오늘 아침, 세상에 대고 무어라 소리를 지르듯 벌게진 얼굴로 밖을 향해 나팔꽃이 피어났다..
철없는 어른 2021.7.7 철없는 어른 그의 목소리가 점점 도드라졌다. 검표원이 승객을 점검하고 내려서자 버스가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선다. 어수선하던 차 안 분위기는 잦아들었지만, 한 가닥 그의 목소리만 나이론 줄처럼 길게 남겨졌다.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 길, 몸이 천근만근이다. 군드러진 몸은 시트에 맡기기로 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할 터이다. 쟁쟁했던 한낮의 태양도 비스듬히 스러지니 어느새 차창엔 승객들의 모습이 선명하다. 멈추지 않는 파도 소리처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칠 줄을 모른다. 곧 멈추겠지. 까무룩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10분도 채 안 되어 안개 걷히듯 의식은 점점 또렷해졌다. 버스는 기흥 휴게소 앞을 달리고 있다. 피곤에 절은 승객을 싣고 충성이라도 하듯 어둠을 가르며 힘차게 달린다. 흥분된..
심심하면 안 되나요 (21.06.23) “이제 미술 학원에라도 보내야겠어요.” “……? 아이가 그림을 좋아하나 보죠?” “그게 아니라…….” 아이의 어머니는 답답한 듯 말끝을 흐린다. 학원을 더 보내자니 경제적 부담이 만만찮고 그냥 집에서 혼자 지내게 하자니 내 아이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해보라고 권해보아도 늘 신통치 않아 하며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한단다. 어떤 때에는 집에서 멍하니 혼자 있을 때가 많단다. 이를 지켜보는 엄마는 아이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혀야 하는데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다. 이제 겨우 아홉 살 된 어린아이인데……. 어렸을 때 나도 비슷했다. 나 역시 늘 마당가를 빙빙 돌며 혼자 지내던 때가 참 많았다. 물론 그때는 글을 모르니 책을 읽을 줄도 몰랐고 장난감이래야 깨진 사기..
연초제조창을 기억하다 청주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 청주를 떠나 있다 수십 년 만에 돌아왔으니 연초제조창이라고 해야 더 잘 알아듣는 세대다. 흰 건물과 창고, 우뚝 솟은 굴뚝에서 옛 연초제조창의 모습이 어렴풋하다. 현대식 건물 뒤편에 막사처럼 보이는 나지막한 동부창고가 보인다. 예전의 창고가 아닌 창조의 문화공간이란다. 저곳에 그 많은 연초를 보관했었다니. 내가 자라던 시골 마을에는 담배밭이 참 많았다. 집집마다 주로 담배 농사를 지었고 지붕이 높다란 담배 건조실이 내 눈엔 이층집처럼 퍽 근사해 보였다. 잎이 널따란 담배는 동네 사람들의 주 수입원이었겠지만 어린 내 눈엔 예쁘지도 먹을 수도 없는 담배밭이 지루할 뿐이었다. 부모님이 계신 청주 집에 다니러 왔을 때다. 안방 한구석엔 아버지를 위한 재떨이가 늘 준비되어 있었다. ..
아버지의 청춘(2021.6.9) '나는 음지쪽 잣나무에 기대어 무릎 쏴 자세를 취했다. 그쪽 음지에 그림자 하나가 넘어오는 것이 보인다. 거기에는 개인 호가 있다. 북쪽을 향해 파놓은 아군의 진지다. 나는 칼빈총을 조준했다. 이미 넘어온 놈은 보이지 않고 이어 넘어오는 놈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명중이다. 그때 먼저 넘어온 놈이 봉우리 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또다시 당겼다. 그놈도 그 자리에 쓰러졌다. 불과 50여 미터밖에 안 되니 안 맞을 수가 있나. 나는 쾌재를 불렀다.(중략) 이것이 전쟁인가, 불행한 민족의 앞날과 나도 앞으로의 전투에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 그때 모습을 생각하니 씁쓸한 감정에 휩싸였다. ' 아버지의 자서전 일부이다. 후보생으로 지원하여 임관하기도 전에 6.25를 맞으셨다. 삽..
강현자의 잠시만요// 슬리퍼 https://story.kakao.com/_iTZqW5/H5XDJDxyqvA
개미의 꿈 2021.04.14 순우분은 술에 취해 회나무 아래서 깜빡 잠이 들었다. 이때 나타난 두 使者를 따라 회나무 아래 구멍으로 들어간다. 그곳 괴안국에서 임금의 환영을 받은 순우분은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 딸을 낳고 남가군의 태수가 되어 태평성대를 누리며 20년을 살았다. 하지만 공주가 병으로 죽고 단라국의 침입으로 패하게 되자 순우분은 임금으로부터 돌아가라는 명을 받는다. 당나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아직도 회나무 아래서 잠을 자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하도 이상하여 나무 아래 구멍을 파 보니 그곳은 개미 왕국이었다. 시멘트 콘크리트 아파트는 일 년 내내 같은 모습 같은 표정이다. 아침마다 잠에 겨운 지하 주차장이 검은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한다. 간밤에 피로가 덜 풀린 듯, 소화불량에 걸린 듯 출근하는 자동차들을 마구 토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