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이 있는 수필

나비가 머무는 이유

나비가 머무는 이유

강현자

 

은탄리로 들어가는 길목에 백일홍이 지천이다. 마을 어귀에서 급히 차를 세웠다. 어딜 가도 고만고만한 시골풍경이 심상해질 즈음, 백일홍이 새뜻한 색깔로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흔하게 보아온 꽃이건만 그동안 잊고 지냈다. 화려한 외래종 꽃들에 밀려나 있었나 보다. 내가 다른 데에 한눈파는 동안에도 묵묵히 지켜보며 기다려주었던 친구처럼 반갑다. 여름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긴 더위와 장마에 지쳐있는데 고운 빛깔의 꽃무리를 보니 갈증에 샘물을 한 바가지 들이켠 듯 시원하다.

그것도 한두 송이가 아니고 무리지어 피었다. 마치 무도회장에 나온 무용수들의 공연복처럼 화려하다. 수많은 벌나비가 꽃잔치에 초대받아 분주하다. 잘 차려놓은 잔칫상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리저리 집적거린다. 카메라를 준비하는 손길이 바쁘다.

노랑, 주황, 다홍……. 겹꽃잎이 방금 차려입고 나온 새색시의 주름치마 같다. 고운 자태로 활짝 핀 꽃잎 안에 봉긋한 갈빛 족두리를 얹었다. 그 위에 다시 빙 돌아 노란꽃을 피워 올렸으니 그야말로 꽃 속의 꽃이다. 화려함에 최선을 다한 백일홍에 나도 미소로 답한다.

카메라를 잡으면 나는 매의 눈으로 변한다. 망원렌즈를 꺼내 움직이는 나비를 따라 프레임을 맞춘다. 하지만 렌즈의 시선을 감지하는 레이더망이라도 있는 것인지 이 녀석들 카메라를 조금만 돌려도 잽싸게 날아오른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얼굴에 간질간질 물길을 낸다. 렌즈를 줌인하여 최대한 멀리 앉은 나비를 찾는데 한 녀석이 딱 걸렸다. ‘착착착……연사로 눌러댔다. 얼마나 열심인지 셔터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늘고 긴 다리로 단단히 버티고 서서 요리조리 가만가만 방향을 바꾸어가며 사랑놀이하느라 여념이 없다. 나도 다리에 힘을 주고 단단히 중심을 잡고 서서 숨죽인 채 가만가만 셔터를 누른다. 호랑무늬 날개를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데 그 모습이 반사적이다. 숨이 막힐 듯하다. 사랑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순간이리라.

그런데 이상하다. 나비가 앉은 꽃들은 하나같이 상처가 있다. 이번에는 색이 조금 더 고운 꽃에 핀을 맞추고 나비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저 스쳐 지나칠 뿐 나의 기다림을 저버리고 만다. 아쉽지만 하는 수 없이 다시 나비를 좇기로 한다. 꽃을 찾는 나비에 대한 그동안의 관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왜 나비는 상처 있는 꽃에만 앉는 것일까?

 

언젠가 장을 담그며 생활하는 한 아낙을 알게 되었다. 첫 방문이라 쭈뼛쭈뼛하며 들어서는데 그녀가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는다. 화장기 없는 민낯이 도리어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손수 만든 차를 우려내리고 직접 담갔다는 갖가지 효소를 넣어 만든 맛깔난 음식을 내왔다. 건강한 맛이 듬뿍 담긴 진수성찬이었다. 이런 후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건지 잠시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도시적 계산이 너울댔다. 우리의 그런 부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묵나물이며 둥굴레 심지어 누룽지까지 봉지봉지 담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인정을 건네는 손길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즐거움과 자신감이 배어나왔다.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얼굴에는 나이를 가늠하게 하는 잔주름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숱이 드뭇한 머리는 뒤로 질끈 동여매고 펑퍼짐한 몸매는 일바지로도 가리지 못했다. 환한 웃음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그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동갑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덕에 반나절을 아지랑이 피어나듯 많은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 벚꽃잎 날리듯이 봄 하늘로 흩어져 갔다. 그때 그녀의 아들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겨우 6학년이란다.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지나온 이야기를 슬쩍 비쳤다. 소녀가장으로 살아온 그녀의 학창시절, 어렵게 결혼한 남편의 배신과 함께 얻은 자궁암, 그 이후 10년 연하의 남자와 재혼, 그리고 뒤늦은 육아. 그녀는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그동안 살아온 삶의 무게가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분에 넘치게 행복하단다.

환한 얼굴 뒤에 고통의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던 것을 알고 나니 그 미소가 더욱 값져 보였다. 애면글면 고난을 향기로 만든 그야말로 된장처럼 잘 익은 사람이었다. 만약 꽃길만 걸어왔다면 지금의 그녀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처가 발효되어 향기로 승화시킨 그녀가 아름답다.

 

나이 드는 동안 우리는 저마다 숱한 자갈밭이나 가시밭길을 건넌다. 갈기갈기 찢겨 울부짖으며 고름이 터지고 나면 그제야 상처가 아문다. 새살이 돋기까지 마음엔 수없이 소용돌이치는 게 있다. 끝 갈 데까지 가고 난 뒤에 결국 미워하는 마음이 미안한 마음으로, 억울했던 분노가 용서와 화해로 바뀐다. 많은 것을 겪은 후에야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르는 척 눈감아줄 줄 아는 여유가 생긴다. 점점 사람의 향기가 짙어가는 것이다. 여름 한나절 괄괄한 땡볕의 등살과 작달비에 숱한 고난을 겪느라 생채기투성이인 백일홍에 나비가 모이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게서는 어떤 향기가 날까. 남에게 펼쳐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은 그런 향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나 혼자 고고하기보다 저 백일홍처럼 주변에 많은 인연이 맺어지는 그런 향기 말이다. 흠집 난 꽃잎에 앉아 열심히 구애하는 나비와 백일홍에 연신 셔터를 누른다. 나도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아니 생채기투성이인 한 송이 백일홍이라 할까. 괄괄한 땡볕에 감질나는 실바람에도 등줄기의 땀이 식어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