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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한 나무에서 벗하지 않는다 엄동설한의 냉기가 뼛속을 파고든다. 유릿가루 같은 눈발이 어깨를 스치며 허공에서 흩날린다. 잔뜩 움츠리고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 무겁다. 찬바람을 몸에 잔뜩 묻히고 한 사내가 부동산사무실로 들어선다. 건장한 어깨가 축 처졌다. 피로에 지친 모습이다. 이사 날짜가 임박한 것으로 보아 이미 여러 부동산을 거쳐 온 듯하다. 월세는 시세보다 웃돈을 내도 괜찮다고 했지만 아이가 딸린 세입자를 원하는 임대인은 아무도 없었다. 맥없이 돌아서는 젊은 가장의 뒷모습은 절망의 울타리였다. 아이 때문에 가는 곳마다 거절당했을 젊은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렸을까. 곧이어 월세를 놓아달라는 중년의 여자가 찾아왔다.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당차 보였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는 구구절절 임대조건을 설명한다. 보증..
비광/한국수필 1월호 비광 (한국수필 2021 다시읽기 12선) 강현자 복이라곤 어디에도 붙어있을 것 같지 않다. 벚꽃 같은 화사함도 없다. 그렇다고 보름달만큼 풍성함이 있는 것도 아니요, 富를 꿈꿀 처지도 아니다. 光은 光이건만 빛이 없다. 오노도후라는 일본 서예가가 있었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비관하여 낙향하던 길에 비를 만난다. 버드나무 아래서 비를 긋던 중 빗물에 휩쓸리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개구리를 발견한다. 오노도후는 되지도 않을 일에 힘을 쏟는 개구리가 자신과 처지가 같다며 불쌍히 여긴다. 순간 불어온 강풍에 나무가 휘청거리자 개구리는 가까스로 가지를 붙잡고 탈출한다. 이를 본 오노도후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비광에 그려진 그림 이야기다. 오노도후의 긴 도포자락은 어렴풋..
바람이여!/2021.12.22 바람이여! 강현자 마늘 한 줌 심어 놓고 여간 분주한 게 아니다. 참새떼처럼 하루에도 열두 번씩 휑한 밭을 들락날락하는 것이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솜씨로 무슨 농사를 짓겠나 싶어 시험 삼아 한 이랑만 심었다. 수확의 기쁨을 생각하면 마음은 벌써 저만치 초여름으로 달려간다. 씨마늘을 넣고 비닐을 씌웠다. 뿌듯함도 잠시,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왜바람이 달려와 비닐을 훌러덩 벗겨버렸다. 마치 세상 구경에 넋을 잃은 탈주자처럼 비닐은 제멋대로 이리저리 나부낀다. 남이 보면 우세스러울까 얼른 보수를 했으나 또 벗겨지고 말았다. 아예 부직포를 사다 덮고 가장자리를 핀으로 고정시켰다. 바람은 나를 비웃듯 또다시 부직포마저 들썩이며 핀을 뽑아내고 있었다. 바람은 무슨 원한이 있어 저리도 갈피를 못 잡고 허공을 헤매..
홍시/2021. 12. 8 복순 언니네 은행나무도 이제 하얗게 팔뚝만 드러내고 서 있었다. 거리엔 찬바람이 휴지 나부랭이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결석을 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던 어느 늦가을이었다. 한 삼일 학교도 못 갈 정도로 독감에 몹시 시달렸다. 평소 같으면 밖에 나가 고무줄놀이며 술래잡기, 지남철 놀이까지 다 하고 해가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텐데 누워 있는 며칠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열병이 좀 가라앉자 밖이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터라 도저히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술은 하얗게 마르고 입안은 쓴맛이 진동했다. 그렇게 누워 있은 지 3일째 되던 날, 아버지께서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비밀스럽게 귓속말을 건네셨다. “뭐가 제일 먹고 싶은지 말해봐. 아버지가 언니들 모르게 너만 사줄게..
날마다 천국/2021.11.10 날마다 천국 강현자 눈도 떼어내고 살점도 떼어냈다. 허우룩한 몸뚱이에 음산한 기운마저 돈다. 알몸을 드러내니 햇덧에 더욱 을씨년스럽다. 이사 갈 집을 수리하는 중이다. 누더기가 된 집이 그나마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은 전 주인이 잘 가꾸어 놓은 잔디 정원과 보랏빛 아스타 무리, 돌계단 바로 옆 국화 한 무더기 덕분이다. 열여섯 여자아이의 젖꼭지처럼 봉긋한 국화 봉오리에 가을볕이 내려앉고, 이제 막 손가락을 펴기 시작한 꽃에는 벌들이 몰려와 간지럼을 태운다. 꽃봉오리도, 이미 핀 꽃도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저들끼리 잘나고 모자람을 시샘하지 않는다. 인간처럼 서로 비교하고 시기 질투를 했더라면 아마 생채기가 난 꽃도 있으련만 모두가 한결같다. 돌계단 아래 이름 모를 꽃이 눈에 띈다. 분명 잡..
시골쥐 서울쥐/2021.11.24 시골쥐 서울쥐 강현자 수확을 끝낸 가을 들판은 파리하니 야위어가고 있었다. 풍요를 품었던 대지도 이제 휴식에 들어갈 참이다. 고추밭에는 아직 거두지 않은 고춧대가 마른 할아비처럼 간신히 찬 바람을 버텨내고 있다. 늦둥이 고추는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면서 멈춤을 모르는 듯하다. 농사를 짓는 지인을 만났다. 주섬주섬 지고추를 따더니 한 자루나 안겨준다. 삭혀서 먹기도 하고 밀가루를 묻혀 쪄서 말리거나 양념장에 무쳐 먹으란다. 그래도 남으면 이웃과 나누어 먹으란다. 넉넉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만 주세요. 나도 집에 많이 있어요.” 하자 그가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아차 싶었다. 전에 잠시 텃밭을 일군 적이 있다. 상추며 호박, 배추, 부추 등등 밭에만 가면 마트가 따..
금쪽같은 내 아들/2021.10.27 습관처럼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안타까운 사연을 읽었다. 아들이 보이스피싱에 연루되었단다. 애타게 일자리를 찾던 아들이 드디어 취직을 했는데 알고 보니 보이스피싱의 현금 수거책이었단다. ‘대부업체 수금업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에 속아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하던 아들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니 역시 피해자인 피의자란다. 어머니는 한결같이 아들의 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세상에 대고 원망어린 억울함을 구구절절 쏟아냈다. 금쪽같은 아들이 피의자라니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사정은 딱하지만 왠지 씁쓸했다. 그녀의 아들처럼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아들은 아직 어리고 순진하다. 내 아들이 잘못된 것은 순전히 친구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나쁜 친구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
대추를 주우며/2021.10.13 대추를 주우며 강현자 수십 년 만에 외사촌 오빠를 만났다. 나를 각별히 아껴주시던 분이다. 오빠는 나도 모르는 어릴 적 추억이 새록하니 아기 때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신다. 나도 이미 환갑을 맞았건만, 긴 세월 중 가운데 도막은 뭉턱 잘려 나가고 여전히 서너 살배기로 남아있단다. 신기한 듯 자꾸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신다. 우리는 오빠네 대추 농장으로 갔다. 긴 장대로 툭, 툭, 대추나무 가지를 치니 후두둑하고 대추가 떨어진다. 이런 경험이 처음인 나는 그야말로 대박을 맞은 듯이 대추를 줍느라 허리 아픈 줄도 모르고 눈에 불을 켠다. 반들반들 탱탱하게 여문 빨간 대추가 여기저기 흩어졌다. 생대추를 워낙 좋아하는 나는 소쿠리에 주워 담기도 전에 연신 입으로 손이 간다. 생대추는 아삭아삭하며 자극적이지 않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