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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수필

버리지 못하는 버릴 수 없는

버리지 못하는 버릴 수 없는

강현자

 

천지가 뒤집히는 것은 찰나였다. 거만하게 직립보행을 하던 한 인간이 순식간에 납작 엎드려 콘크리트 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육중한 무게의 추락은 무의식의 늪에서 꼿꼿하던 오만함을 무참히 꺾어버렸다.

줄지어 주차된 자동차들 뒤에서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보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누가 오기 전에 얼른 일어나야 한다. 양쪽 무릎과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 곳으로도 중심을 잡을 수 없어 한동안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몸살감기로 집에 누워있다가 겨우겨우 한의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몸살 기운에 정신이 혼미하여 어찌어찌 운전은 하고 갔지만 주차장 바닥의 배수 홈을 보지 못하고 걸려 그대로 엎어진 것이다. 엉거주춤 절룩거리며 들어간 내게 의사는 침을 놓아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누우려는데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도가 점점 심해 참을 수가 없다. 아마도 지난 주말 손주를 괴롭히던 로타바이러스가 내게로 와 둥지를 틀었나 보다. 이미 감기가 터를 잡았노라고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통사정을 했더니 그동안 품고 있던 오욕칠정을 모두 꺼내놓으란다.

 

욕심, 욕심, 그리고 욕심비움의 순간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천지가 또 뒤집힌다. 숨이 턱까지 솟구치며 세상이 노랗다. 숨이 꼴깍 끊어졌다 이어진다. 끝도 없이 쏟아낸다.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것들이 이리도 많았던가. 세상이 또 한 번 뒤집힌다. 소중하다 여기며 내 안에 차곡차곡 쟁여놓았던 것들. 꺼내놓고 보니 추하기 이를 데 없다.

새벽녘이 되자 사색의 방에서 또 나를 부른다. 아직 남은 게 있단다. 마지막 물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갈 모양이다. 가져가라, 가져가라, 내 것은 본디 하나도 없었느니라.

 

무엇을 이루려고 아등바등 모으려고만 했던가. 그래서 남은 게 무엇인가. , 명예, 명성, 사람.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일까. 내게 과연 꿈이란 게 있기나 했을까? 참고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옛 이야기하며 사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적은 있었다. 이제 그나마 그런 꿈을 꾼들 허락된 시간도 많지 않다. 부단히도 붙잡고 있었던 것들, 하지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지금, 생의 끈을 놓는다 한들 한 조각 미련도 없을 것 같다.

 

세상의 바깥으로 던져지는 마지막 순간에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성을 놓지 않은 평상시의 모습일까, 아니면 정신줄을 놓은 채 변해버린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까. 억누르고 살았던 나의 본능이 그대로 나타난다면 과연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다 무슨 소용이랴. 하루도 허투루 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열심히 달려서 지금 여기까지 와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 결과다.

 

전에 남기성 작가의 사진전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작가는 집 안을 청소하다가 발견한 머리카락에 엉킨 먼지와 모니터에 앉은 먼지를 소재로 사진을 찍었다. 까만 배경에 무질서하게 떠다니는 먼지의 모습은 끝이 없는 우주를 떠도는 별들과 같았다. 어쩌면 그 먼지가 바로 나 자신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먼지가 무엇을 이루겠다고, 아니 이루지 못했다고 그토록 아우성이란 말인가. 아무것도 갖지 않았어도 먼지요, 숨 가쁘게 움직여 악착스레 내 것으로 모았어도 한갓 먼지에 불과한 것을.

법륜 스님은 삶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말라고 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거란다. 잘 되었든 잘못되었든 그냥 사는 거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혼자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아팠을 때, 참 행복하다고 느꼈다. 약을 먹고 누워 쉬는데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이다. 아픈 몸 끌고 일어나 누구에게 밥상을 차려줄 일도 없고 집안일이 밀려도 누가 뭐랄 사람 없으니 내 몸이 일어나고 싶어질 때까지 누워 쉴 수 있었다. 누구 손에 약봉지 들려 먹어 본 적도 없으니 오히려 상대적 외로움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몸은 아파도 마음은 참 편안해서 좋았다.

 

지금도 그렇다. 누가 있다고 덜 아프고 아무도 없다고 더 아픈 것이 아니잖은가? 때가 되면 가라앉을 것을 그걸 이기지 못한대도 어쩔 수 없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달라면 주고 주면 받고. 다 그런 거지.

다시 으슬으슬 한축이 난다. 주섬주섬 일어나 쓰디쓴 약을 넘긴다. 그래도 버리지 못하는 것임을, 함부로 버릴 수 없음을, 그냥 먼지로 살아갈 것임을 알아가는 중이다.

 

(한국수필 202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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