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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수필

환희산에 안기다/2022.12 한국수필 발걸음 에세이

환희산에 안기다

-정송강사-

 

그가 누워있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산그늘마저 열기를 걸러내지 못할 만큼 푹푹 찌는 더위만 아니라면 단숨에 올라가도 좋으련만, 족자를 걸어놓듯 앞에 내걸린 오솔길을 오르자니 숨이 턱에 닿는다. 발끝을 보고 걷는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잣방울이다. 이미 도사리가 되어버린 잣방울이 아직 싱싱한 초록빛을 머금은 채 발길 뜸한 산길에서 애처롭다. 솔방울보다 걀쭉한 몸매는 고결한 선비의 모습이요, 이미 끝이 뾰족하게 선 잣방울 조각은 대쪽같은 그의 성품이지 싶다. 실하게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떨어진 잣방울의 모습에서 그가 떠오른 것은 어인 일일까.

 

강호(江湖)에 병()이 깁퍼 죽림(竹林)에 누었더니

관동(關東) 팔백리(八白里)에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聖恩)이야 가디록 망극(罔極)하다

연추문(延秋門) 드리다라 경회남문(慶會南門) 바라보며

하직고 물너나니 옥절(玉節)이 압패 섰다

평구역(平丘驛) 말을 가라 흑수(黑水)로 도라드니

섬강(蟾江)은 어듸메오 치악(雉岳)은 여긔로다

소양강(昭陽江) 나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말고

고신거국(孤臣去國)에 백발도 하도할샤

 

국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이라 할 만한 관동별곡 서곡이다. 송강은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관동팔경의 여정과 산수풍경, 자신의 소감 등을 화려한 문체로 여지없이 나타냈다. 정철의 시향을 느껴보려 그의 생을 둘러보기로 했다.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정송강사가 있다. 환희산 품에 안긴 그곳은 산새 소리만 들릴 만큼 고즈넉하다. 주차장에 들어서면 입구에 우람한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반긴다. 400년 세월이 버거웠는지 목발을 짚은 느티나무엔 수많은 잎새들이 물감을 풀어 그림을 그린 듯 음영이 선연(鮮姸)하다. 햇빛을 받아 하늘거리는 초록 이야기들이 마치 송강의 생을 두런두런 나누는 듯하다.

홍살문 앞 신도비에 우암 송시열은 마음은 호수같이 맑고, 기질과 절개는 대나무같이 푸르셨다.’고 했다. 정치인으로서의 송강에 대한 기억은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양면으로 나뉜다. 충직하고 맑으며 의로운 인물이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아량이 적고 복수심이 강하다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러니 정치무대에서 그의 행로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홍살문을 들어서기 전 왼편에 몇 개의 시비가 눈에 띈다. 술을 좋아했던 송강이라는 것을 알기에 장진주사에 눈길이 머문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세어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                 이어 매여 가나 유소보장의 만인이 울며 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어찌하리

 

죽어서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냐며 마시고 또 마시고 무진무진 마시자 한다. 이토록 술을 좋아하던 송강이다. 선조가 하루에 한 잔만 마시라고 은잔을 하사했는데 송강은 한 방울이라도 더 먹으려고 그 은잔을 찌그러뜨려서 대접으로 만들었다니 그가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알 만하다.

송강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진정한 사랑꾼이었다.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만난 기녀 강아와의 사랑 이야기가 궁금하다. 강아는 정철이 임기를 마치고 떠난 후에 유배지까지 가서 수발을 들었는가 하면 지금도 강아의 무덤이 송강의 원래 묘소가 있던 고양시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저 스치는 바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어쩌면 이 술 때문에 그의 정치적 입지가 불리하도록 빌미를 주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풍류를 즐길 줄 알았기에 그의 문학적 예술성이 한층 고조되지 않았을까?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에는 그의 시호를 따서 지은 문청문(文淸門) 현판이 걸려있고 왼편으로 정철 시비가 걸음을 이끈다. 송강이 50세 되던 해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으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논척을 받고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은거하던 중 지은 사미인곡이 새겨져 있다.

 

동풍이 건듯 불어 쌓인 눈을 헤쳐내니, / 창밖에 심은 매화 두세 가지 피었구나

가뜩이나 냉담한데 그윽한 향은 무슨 일인고 / 황혼의 달이 쫓아 베갯머리 비치니,

느끼는 듯 반기는 듯 임이신가 아니신가 / 저 매화 꺾어내어 임 계신 데 보내오저

임이 너를 보고 어떻다 여기실꼬

 

송강은 경험에서 얻은 일상의 삶을 진솔하게 글로 담아냈다. 사미인곡은 정철이 호방한 품성을 지녔음에도 섬세하고 애절하리만큼 여성성을 보이기도 한다. 연군의 정을 마치 남편을 생이별하고 연모하는 여인의 마음으로 빗대어 자신의 충절을 고백한 가사다. 이를 두고도 지나치게 아첨한다거나 마음을 흐리게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니 이 또한 이념을 달리하는 반대 세력가들의 편견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철 시비 맞은편에 팔작지붕을 한 송강기념관이 있다. 술을 좋아했던 터라 역시 옥배, 은배가 전시되어 있고 그의 친필편지와 생전의 시와 가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들에게 보낸 친필편지에는 무뚝뚝한 듯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의 정이 엿보이기도 한다.

忠義門(충의문)을 지나 사당으로 올라선다. 목조 맞배지붕 아래 송강사(松江祠) 현판이 걸렸다. 슬쩍 비껴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니 엄한 듯 선한 눈매의 송강 초상화가 나를 맞는다. 그보다 몇 년을 더 살고 있지만 유야무야(有耶無耶)하게 지내는 내게 뭐라 전할 말이라도 있는 듯하다.

명종 때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할 당시 명종의 사촌 형인 경양군의 죄를 집행해야 했다. 명종이 관대하게 용서하라고 사사로이 부탁하였으나 송강은 상감의 뜻을 거스른다. 더구나 명종과는 어려서부터 동궁에 드나들며 함께 거처도 하고 놀기도 할 만큼 가까이 지내던 사이가 아니던가. 이 일로 오랫동안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기도 한 것을 보면 그의 성품이 얼마나 대쪽같았는지 알 만하다.

그의 강직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술과 여자를 좋아했기에 그것이 빌미가 되어 동인들로부터 숱한 화살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품성은 언제나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과 같았다. 정사(政事)는 정사대로 개인사(個人事)는 개인사대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그다. 관직의 자리에서는 치열하게, 문학을 할 때는 섬세하게, 술을 마실 때는 호탕했으니 시대의 엘리트이자 풍류인이 아니었겠는가.

환희산 품에 안긴 사당을 뒤로 하고 남쪽을 바라보니 곁에서는 흐르는 물소리가 계곡을 가르고, 저 멀리 좌청룡 우백호 형상의 능선이 수묵화처럼 펼쳐졌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진천 땅에 송시열이 송강의 묘소를 이장하고 신도비를 세운 이유를 알 만하다.

물고기가 숨어있는 지형이란 뜻을 가진 어은골에 송강의 묘소가 있다. 정송강사 입구에서 300m쯤 떨어졌다. 그의 묘소로 향하다 도사리가 되어버린 잣방울에서 송강이 떠오른 것은 그의 생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대나무같이 푸르렀던 그의 기질과 절개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후 도중 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탄핵, 파직, 귀양. 정철에게는 평생 익숙한 말들이다. 관직에 몸을 담고 굴곡진 삶을 살다 후세에까지 입방아에 오를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의 성품이 어땠는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개성이 강하고 타고난 기질에 충실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려는 의욕적인 인물이라면 오히려 본받아 마땅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 과거의 인물과 대화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문학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송강의 국문학사적 가치를 인정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한문으로 된 글을 높이 사던 시대에 우리말을 차원 높은 예술 언어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다. 요즘 한글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더 나아가 정철 같은 문인의 후예로서 우리의 문학도 세계무대로 성큼 올라서길 바라본다. 환희산에서 흘러온 한 줄기 바람이 어은골에 스민다. 소나무()의 절개가 강물() 되어 흐르듯이.